▲팔기 중 4기양황기. 양홍기. 양백기. 양남기. 공포의 팔기군 깃발이었다.
이정근
수하 장수가 극구 만류했다. 도르곤이 홍타이지의 사망사실을 접한 거의 같은 시각. 홍타이지의 장자 호격에게도 황제의 사망사실이 알려졌다. 황궁에 심어둔 첩자에 의해서다.
전갈을 받은 양황기의 8대신이 호격의 집으로 속속 모여 들었다. 양황기는 팔기 중 하나로 누루하치의 직할 부대였으며 홍타이지를 황제로 배출한 전통 있는 기(旗)다. 하지만 호격은 기주는 아니었다.
호격의 집에 모인 투얼거, 수오니, 투라이, 시한, 공이다이, 아오바이, 판타이, 타잔 등 8대신은 호격을 황제로, 복림을 태자로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자신들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으면 힘의 대결도 불사한다는 결의를 채택했다. 적전 분열되어 내전의 늪으로 빠져드느냐? 군력승계가 순조롭게 이행되느냐?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다.
"일없다. 저놈들이 감히 이 도르곤 앞에서 칼을 빼겠느냐?"
말을 마치자마자 도르곤이 말에 올라 바람같이 사라졌다. 호격 집에 도착한 도르곤은 살벌한 분위기를 느꼈다. 좌우를 휘둘러 본 도르곤이 눈알을 부라리며 입을 열었다.
"황제께서 승하하신 비상한 시기에 각자 자기의 소속부대에서 대기해야 할 놈들이 여기에 모여 무엇들 하는 것이냐? 이런 베라 먹을 놈들 같으니라고, 여기 칼이 어디 있느냐?"도르곤이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호격 휘하 장수의 칼을 빼트리려 하자 8대신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호격이 도르곤 앞에 나섰다.
"억울하면 황제께 여쭈어 보아라""숙부님 용서해 주십시오. 저의 불찰입니다.""오냐, 너의 부주의를 용서한다. 어젯밤에 폐하께서 승하하셨다. 알고 있었겠지?""네, 알고 있었습니다.""차기 황제를 복림으로 하고 호격을 태자로 한다.""아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억울하면 황제께 여쭈어 보아라."죽은 자는 말이 없다. 무얼 물어보라는 것인가.
"하오거! 황제께서 나에게 옥새를 맡겨두셨다는 사실을 넌 잘 알고 있겠지?"도르곤이 호격을 노려보았다. 불응하면 옥새의 힘으로 처치하겠다는 무언의 암시다. 홍타이지는 평소 군권과 옥새를 도르곤에게 맡겨두고 있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알고 있다니 다행이다."살기 띤 도르곤의 눈초리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복림이 성년이 될 때까지 정진왕과 예친왕이 섭정을 한다.""너무 하십니다. 숙부님."호격이 울먹였다.
"내 말을 잘 들어라 하오거! 내가 비록 섭정에 올랐지만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 오로지 북경이다. 너의 아버지와 나의 꿈은 북경이었다. 북경의 꿈을 너의 아버지와 함께 이루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황제께서 먼저 가셨다. 네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나와 함께 북경의 꿈을 이루어 다오."도르곤의 목소리는 떨렸고 진정성이 있었다.
"명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