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장비가 다 갖춰진 모형이 석탄 박물관에 서 있다. 하지만 그 당시 저런 장비는 없었다. 저 장비가 오직 모형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 현실이다.
장성호
조선인에 대한 강제 연행이 시작된 것은 1937년 중일 전쟁이 터지면서이고,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그것은 가속화되었다. 일제는 전선의 확대에 따라 병력을 추가하면서 본국의 전시 산업을 뒷받침할 수 있는 토공, 직공, 광부와 같은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강제 연행된 조선인들은 노동 재해가 빈발한 장시간의 위험 지대에 배치되었고, 그 중 60%는 탄갱과 광산에서 일하게 되었다.
우리 여행팀의 첫 주제도 '기타 큐슈에 있는 탄광'과 관련된 곳이다. '석탄 박물관.' 기타 규슈에 있는 탄광 이야기를 기념하는 박물관이다. 원래 탄광의 노동은 죄인, 노예를 통해서 이루어졌단다. 이들이 살아가는 환경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열악했고 일하다 대부분 죽었다고 했다.
박물관은 석탄을 캐는 공정과 그 당시 여기서 힘들게 일했던 일본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잘 묘사하고 있다.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국가의 보호를 받게 된 그들의 죽음은 이렇게 위로받고 보상받을 수 있게 된다. 물론 충분한 보상과 위로는 아니지만.
그러나 이 지역 탄광은 조선인들 역시 강제로 끌려 와 일했던 곳이다. 그런데 그 박물관에서 조선인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가이드의 설명을 한 자도 놓치지 않은 채 주의 깊게 들었지만, 박물관 안에서 힘겹게 살았던 조선인 이야기는 찾을 수 없었다. 박물관을 나와 약간 떨어진 곳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야 조선인을 위한 조그만 '위령비'를 보게 되었다. 위령비가 있는 곳은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인데 가장 밑에서 일한 이들의 넋을 기리며 민단에서 20년 전 세운 비석이란다.
그러나 이곳으로 강제 징용된 조선인이 정확히 몇 명이었는지, 몇 명이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여명'이라는 숫자 뒤에 붙여진 수식어는 인간의 생명이 추상적으로 표현되며 무시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일은 지금도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다.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 군인의 사상자 수는 철두철미하게 집계되지만 이라크에서 죽어간 무수한 민간인과 군인의 수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죽어서까지 차별당한 것이다. 살아서 존중받지 못했던 그들의 삶은 죽어서도 버려진 채로 남았다. 그들의 서글픈 삶을 어떻게 위로해 줄 수 있을까?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어떻게 함께 짊어질 수 있을까?
이들의 슬픔을 기리려고 일본 내에서도 인권운동이 지속되어 왔다. 우리가 방문한 영생원과 오다야마 묘지는 재일조선인들과 일본의 양심 있는 운동가들이 비극적이었던 역사와 대척하여 만든 소중한 유산이다.
규슈 지역과 홋카이도 지역은 채광을 비롯 석탄과 철광석 수송에 필요한 항만, 철도, 도로 등의 건설에 강제 투입된 조선인이 많았던 곳이다. 그런데 고된 노동 중 죽어갔던 그분들의 시신은 절간에서 제일 구석진 곳에 방치되거나 사과박스에 담겨 놓였다. 최창화 목사는 1973년 영생원을 마련하고 여기저기 떠도는 유골을 찾아내어 안치하였다. 그 당시 타가와 이이쯔카 등의 절에서 유골 157기를 가져왔다고 한다.
그 중 몇몇 유골은 그리운 고향을 찾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현재는 탄광 희생자 뿐 아니라 최창화 목사 부부와 재일 동포 유골 83주가 남아 있단다. 이 영생원은 멀리 동해가 보이는 언덕 위에 마련되었다. 고국을 그리워하는 망자들의 한을 위로하며 죽어서라도 고국을 향하고 싶은 그들의 마음을 담아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