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고즈넉한 산길, 오롯한 오솔길에서 밤 한 톨이 떨어져 나뒹군다.
김학현
온 봄과 여름동안 우리 집 밥상에 올랐던 취나물과 땅 두릅도 벌써 꽃을 달고 있거나 꽃이 진 자리에 열매를 달고 있다. 아, 이렇게 가을은 여름의 둔덕을 넘어 곁에서 무르익고 있건만, 아직 가을이 먼 줄만 아는 이 인생의 느림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더위 탓이라고 변명하는 것은 식상하고, 나이 탓이라고 하면 게으름을 이르는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저 더운 한낮의 기온만 탓하고 있을 때 가을이 이렇게 다가온 것이다. 벌레 먹은 노란 나뭇잎이 이제 자신의 일을 마친 농부처럼 볕이 내리쬐는 언덕을 아랫목 삼아 떨어져 누우려고 준비를 하고 있다. 나의 겨울 준비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가을, 알알이 열매로 영글다긴 여름을 살라먹고도 너무 빠르게 가는 가을. 그 가을만큼이나 빠른 열매들이 자신들의 영역표시를 하는 산이다. 고즈넉한 산길, 오롯한 오솔길에서 밤 한 톨이 떨어져 나뒹군다. 얼른 주워 호주머니에 넣으니 다시 나무 위에서 밤톨들이 소곤소곤 소꿉놀이를 하며 재잘댄다.
사각사각 나뭇잎 부딪는 소리가 바람을 연주자로 내세운 것으로는 너무 잘 어울린다. 바람은 나무들의 열광적인 박수를 받아서인지 더 아름답게 연주한다. 어느 새 '솔솔' 연주하던 바람은 '쏼쏼' 큰소리로 연주한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놀라 떨어진다.
나도 어느덧 흥얼거린다.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그러다 아니란 생각이 들어 노랠 멈췄다. 여름 노래라는 것을 생각한 순간 어울리는 노래가 아니란 생각까지 들었다. 다시 흥얼거린다.
"가을이라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니 푸른 잎은 붉은 치마 갈아입고서 남쪽나라 찾아가는 제비 불러 모아 봄이 오면 다시 오라 부탁하누나 가을이라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니 밭에 익은 곡식들은 금빛 같구나 추운겨울 지낼 적에 우리 먹이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