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 신작 장편소설 <개밥바라기별>
문학동네
작가 자신 <개밥바라기별>을 '자전적이고 개인적인' 소설이라고 밝히고 있기도 하거니와, 황석영에게 월남전 참전을 앞둔 이 시기가 젊음의 방황에서 특별한 구간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아마 돌아보아야 한다면 바로 거기서 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리라.
<개밥바라기별>은 그렇게 베트남의 전장으로 떠나기 직전, 몰개월로의 복귀를 위해 서울역을 떠나는 한 젊은이의 시간에서 일단 멈춘 뒤, 고등학교 시절로 소설의 시간을 길게 되돌렸다가 다시 서울역을 떠나는 열차칸으로 돌아와 끝난다.
덕분에 우리는 베트남의 전장에서 뒤늦게 "인생에는 유치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되뇌게 되기까지 한 젊은이가 숨겨두었던 격렬한 성장기의 싸움을 관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개밥바라기별>에서 명문고생인 주인공 유준과 주변 친구들의 정신적 성장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잿빛 관념이다. 그것은 1950년대 후반 전후의 폐허를 지나며 조금씩 거리의 서점가로 나오기 시작한 세계문학전집이나 사상전집 속의 세계다. 거기에서 엿본 자아의 공간, 그 황홀한 자유의 가능성이 그들을 유혹하지 않았다면 그거야말로 기이한 일일 것이다.
<지상의 양식>을 그들도 읽지 않았을까. "나타니엘이여, 이제는 나의 책을 던져버려라. (…) 떠나라." 그러나 그 떠남과 일탈이 지불해야 할 댓가 또한 그들은 알고 있었고 대개는 그 경계에서 떠남과 일탈의 흉내를 내보곤 자신의 궤도로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좌절하거나 아니면 살아남아서 요 모양의 산업사회를 이끌어갈 사회 지도층이 되었다"고 소설은 기록하고 있다.
유준은 어떠했나. 그는 궤도 이탈을 감행해서, 한차례 유급을 거쳐 학교를 자퇴했다. "어쨌든 내가 그때의 그 모퉁이에서 삐끗,했던 것은 지금에 와서 보면 필연이었다. (…) 그러나 벗어났을 때의 공포는 당시에는 견디기 힘들었다"고 작가는 써놓았거니와, 아마도 정직한 고백이 아닐까. 예비 문사(文士)의 유치한 자부심 따위란 이 공포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 것이었을까.
이후, 유준은 거친 방랑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데 이 뒷배에 묵묵히 아들을 믿어준 어머니의 존재가 있었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의대에 가길 원했지만, 학교를 그만둔 뒤론 아들이 대학노트에 깨알같이 쓴 글을 읽어달라시던 어머니. 전처럼 노트를 치우거나 아궁이에 넣지 않았다. "책을 쓴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제 팔자를 남에게 다 내주는 일이란다." 어머니의 존재 없이 유준의 싸움은 가능하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하는 순간은 <개밥바라기별>의 가장 아름다운 대목이라 해야 하리라.
부랑노동자 장대위를 따라 오징어배를 타고, 공사판을 떠돌며 이른바 '날것'의 살아있는 세상과 만나던 행복은 중단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스스로 벗어났다고 믿었던 것과는 달리, 유준은 여전히 궤도 위에 있었다. 문학이라는 궤도. "그렇다, 세상의 표면만이 또렷할 뿐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글을 쓸 수 없다면 내 존재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잘못 돌아왔다." 유준은 자살을 감행하고 닷새 만에 깨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