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 들머리책방 <뿌리서점> 들어가는 계단 둘레에 쌓인 책들.
최종규
(1) 아이 키우기아이를 낳을 무렵부터는 책방 나들이조차 못하게 되리라 생각했고, 책 한 권 읽기란 더더군다나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8월 16일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에 앞서부터 여러 가지 일거리를 미리 마무리를 짓느라 바빴던 한편, 아이가 태어난 뒤로도 신문잡지사에 보내 주어야 하는 마감글 맞추기에도 빠듯했습니다. 배앓이할 때 늘 곁에 붙어 있었고, 몸풀이는 제가 하고, 아이 돌보기는 함께하고 있으나 젖 물릴 때 빼놓고는 제 몫입니다. 보름째 이대로 이어옵니다.
아이를 돌보는 동안 도서관 문을 닫아 놓고 있어야 합니다. 도서관을 열어 놓는다고 ‘입장료’나 ‘대여료’를 받지 않으니(도서관은 이런 삯을 안 받는 곳이지요. 그러나 저보고 책삯을 받으라는 이야기를 하는 둘레 분이 제법 많습니다) 마땅한 벌이가 되지 않습니다만, 출판사에 보낼 글을 다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못하면서 밤잠이든 낮잠이든 이루지 못합니다. 다짐은 단단히 했지만, 참으로 수월한 일이 아님을 새삼 느끼고, 이렇게 고달프니까 모두들 산후조리원 같은 데가 한 주에 백만 원이니 백오십만 원이니 해도 그예 집어넣고 ‘조리원에 바칠 돈을 버느라’ 돌아치게 되는구나 싶습니다. 이렇게 고단하니까 시부모든 친정이든 ‘손주 귀여워서’ 받아 주기는 해도 싫어한다는 말이 나오는구나 싶습니다.
하루가 하루가 아니도록 보내던 어느 날, 제가 하는 일을 곱게 보아 주는 어느 분이 도서관 달삯을 치르고도 십만 원이 남아 살림돈으로 돌릴 수 있을 만한 돈을 다달이 부쳐 주겠다고 연락을 해 옵니다. 덩달아 제가 그동안 찍은 ‘헌책방 사진’도 사겠다고 말씀합니다.
이제까지 팔아 온 사진이 열 장이 채 안 되는데, ‘헌책방을 말하는 사진’을 기꺼이 바라시고 사시겠다고 하니, 고마움을 넘어서 반갑고 기쁩니다. 또한, 어려운 살림에 구멍이 뚫리는 셈이라 아이 돌보기에 더욱 홀가분하게 마음을 쏟을 수 있습니다.
일본 소설쟁이가 쓴 수필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이라는 책을 읽으면, 글쓴이가 열아홉 살부터 정년퇴직 때까지 일한 신문사 사장이 어느 날 자기를 불러서, ‘난 소설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누구든 밥걱정에서 벗어나야 좋은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이야기해 주면서, 소설만 써서는 밥걱정에서 벗어나기 어려우니, 느긋한 자리를 줄 테니 소설쓰기에 온힘을 기울일 수 있게끔 해 주어서 사장실을 나오면서 눈물이 나왔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꼭 이런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러면서, ‘나도 앞으로 살림이 나아져서 누군가를 도울 만한 형편이 된다면, 이분처럼 마음을 쓸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제 앞날에 살림이 필 날이 있을지는 까마득한 노릇이고, 그저 제 깜냥껏 이웃한테 베풀 수 있는 만큼 베풀며 살아야 하지 않느냐 싶어요. 그래서, 한동안 살림이 너무 팍팍한 탓에 지난 한 해 동안 좀처럼 못하고 있던 길거리 동냥꾼한테 동냥하기를 다시 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저는 못하고 있었어도 옆지기는 우리 살림돈이 몇 천 원 안 남아도 천 원씩 꼬박꼬박 내어주곤 했습니다).
지난해까지는 다문 오백 원이든 천 원이든 백 원이든, 주머니에 있는 대로 털어서 동냥그릇에 넣어 주곤 했으나 올들어 거의 못하며 살았습니다. 오백 원 천 원 백 원 ‘기부’는 딱히 할 만한 데도 없지만, 길에서 먹고자는 이들한테 나누어 주기에는 괜찮고, 나누어 주면서 제 이름이 남지도 않아서 홀가분합니다. 전철을 타러 가는 길에 차가운 돌계단에 무릎 꿇고 앉아서 손 벌리는 아저씨나 할머니한테 동전통을 탈탈 털어서 내어 드리기도 하고, 전철칸에서 손 벌리는 아저씨한테 넌지시 천 원짜리를 건네기도 합니다.
오늘, 용산에 있는 헌책방 〈뿌리서점〉에 찾아가서 ‘저를 도와주고 사진도 사겠다는 분한테 드릴 사진을 들고 찾아가는 길’에 전철을 타고 가면서, 전철 동냥꾼이 한 사람 보이기에 스스럼없이 천 원짜리를 내어줍니다. 옆자리에 앉은 아가씨가 깜짝 놀라 합니다. 뭘 놀라지, 하고 생각하며, 동냥하느라 잠깐 덮고 있던 책을 다시 펼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