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선생
백범 기념관
다시 상해로 돌아와 편지를 보낼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저는 선생님의 보살핌 덕으로 완전히 건강을 찾았습니다. 의사 조순호 선생에게도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녀는 선량하고 기품 있는 여성입니다. 저는 왠지 그녀가 김 선생님의 조카 문수를 깊이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둘이 만날 수만 있다면 그들은 가장 잘 어울리는 남녀가 될 것입니다.
며칠 전 일입니다. 백범이 저를 찾았습니다. 백범은 어른 몇 분의 점심 준비를 해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제가 불려 가는 날은 보통 큰일이나 중요한 모임이 있는 날임을 알고 있습니다. 또 임정의 어른들은 모처럼 모이면 으레 저를 찾곤 하십니다.
저는 깔끔하게 점심상을 보아 놓았습니다. 이동녕 선생과 조완구 선생이 왔고 얼마 안 있어 백범이 합류했습니다. 그 분들은 여느 때와 같이 인사를 나누며 안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백범이 저에게 술과 신문을 사다 달라고 했습니다. 왠지 모르게 백범은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평소에도 술을 즐기지 않았으며 더구나 낮술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집 밖으로 나오자 거리 분위기가 좀 술렁거리는 것 같았고 호외가 뿌려지고 있었습니다. 중국인 청년의 폭탄 거사로 일본군의 민단장 가와바타가 즉사하고 원흉 시라카와는 중상을 입었으며 그 외에도 십여 명의 문무대관이 부상당했다는 기사였습니다. 저는 그때서야 이유를 알아서 서둘러 술과 신문을 사가지고 들어갔습니다.
호외를 받아든 백범은 "일이 제대로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며 두 분에게 술잔을 권했습니다. 그 분들은 축배를 들었던 것입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폭탄을 던진 이는 중국인이 아니고 한인 청년 윤봉길이라는 호외가 또 나왔습니다.
며칠 전 백범은 일본 신문인 상해일일신문을 읽고 거사 결심을 굳혔다고 합니다.
"이제 마음이 편해졌습니다"당시 일본군이 상해 인근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자축하기 위해 홍구공원에서 천장절 축하식을 거행한다는 기사가 일본계 신문에 보도되었다. 참석하는 사람은 물통과 도시락과 일장기를 지참하라고 되어 있었다.
백범은 굵고 검은 안경테를 매만지며 다시 한 번 기사를 확인했다. 백범은 윤봉길을 떠올리고 있었다. 윤봉길이 백범을 찾아온 것은 꽤 오래 전이었다. 윤봉길은 동포가 경영하는 일용품 공장에서 일하다가 근래에는 홍구시장에서 야채 행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백범을 만나자마자 한탄하는 어조로 말했었다.
"제가 야채를 지고 쏘다니는 것은 다 기회를 얻으려 했음인데 이제 일본 놈들이 상해까지 왔으니, 아무리 보아도 죽을 자리를 찾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백범이 윤봉길을 불러 자신의 거사 뜻을 전하자 윤봉길은 "감사합니다. 이제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준비해 주십시오"라고 답했다.
백범은 서문로에 가서 김홍일을 만났다. 그는 상해 병공창에서 일하는 송식표에게 교섭하여 일본식 물통과 도시락에 폭탄 장치를 하여 사흘 안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이틀 후 백범은 안심이 안 되어 김홍일과 함께 병공창으로 갔다. 송식표는 전문기사 왕백수와 함께 물통과 도시락 폭탄의 성능 시험을 해보겠다고 했다. 그는 마당에 파 놓은 토굴의 사면에 철판을 둘렀다. 그러고는 폭탄을 그 속에 넣고 줄을 하나 끌어내더니 수십 보 밖으로 물러났다. 그는 엎드린 후 줄을 잡아 당겼다. 폭탄은 무섭게 터져 오르며 철판을 산산이 조각내 버렸다.
"지난 번 동경에서 불발된 것이 너무 안타까워 이번에는 20여 차례 실험을 하고 나서 실물에 장착한 겁니다."
백범은 폭탄을 받아서 친구 집에 보관했다.
"귀중한 약이니 불에 가까이 가지 않도록 해 주시오."
4월 29일이 다가왔다. 윤봉길은 매일 홍구공원에 가서 식장 설비하는 것을 보며 분위기를 익혔다. 그는 거사 3일 전에 선서문을 써서 백범에게 제출했다. 그는 다음 날 안공근의 집에 가서 선서문을 가슴에 붙이고 왼손에 폭탄, 오른손에 권총을 들고 태극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다음에는 백범과도 한 장을 더 찍었다. 이어서 윤봉길은 약력과 유서를 썼다. 유서에는 고국의 청년들과 두 아들과 백범에게 주는 유시가 기록되었다.
시계와 돈을 백범에게 주는 윤봉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