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돈동감귤박물관에서 바라본 효돈동의 전경이다.
장태욱
이 마을에 고인돌이 발견되고, '대궐터', '절터' 등의 지명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전에 사람이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마을의 형성 시기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족보나 구전을 따라가면 1560년경에 문(文)씨가 지금 신효리 마을 중심에서 동북쪽에 정착한 것이 설촌의 시작이라고 한다.
소가 많아 '쇠둔'에서 효행이 넘쳐 '효돈'으로쇠둔은 17세기에 큰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마을은 다시 상우둔촌(웃쇠둔)과 하우둔촌(알쇠둔)으로 나눠진 후, 각각 번성하였고, 18세기 중반에는 상우둔촌과 하우둔촌 사이에 중우둔리(중쇠둔)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가장 나중에 신우둔리(새쇠둔)이 형성되었다.
쇠둔 혹은 우둔이라 불리던 마을 이름이 18세기 후반부터 '효돈(孝敦)'으로 기록되었다. 주민들은 마을 이름이 효돈으로 변경된 것이 이 마을 출신 선비였던 고명학(高鳴鶴)의 효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고명학(高鳴鶴)은 영조 45년(1769)에 우둔마을에서 출생했다. 집은 가난했으나 글 읽기를 좋아해서 영조18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조정에서 우승 벼슬을 주었으나 늙은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순조14년에도 주어진 장령 벼슬도 사양했고, 다시 대정현감을 제수하였으니 부모의 병환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다.
고명학의 효심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자, 순조22년(1822) 위유어사에 임명되어 제주에 파견된 조정화는 고명학의 행적을 탐문하고 그의 효심이 소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에 어사는 그렇게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 사는 마을이면 우둔(牛屯)보다는 '효돈(孝敦)'이 좋겠다고 하여 효돈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효돈이란 '효가 도타운 땅'이란 의미다.
이에 따라 마을 이름은 웃쇠둔이 상효(上孝)로, 중쇠둔이 중효(中孝)로, 알쇠둔이 하효(下孝)로, 새쇠둔이 신효(新孝)로 변경되었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중효리와 상효리가 합해져서 상효리로 통합되어 상효, 하효, 신효의 세 마을이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1981년 서귀읍이 서귀포시로 승격되면서 상효는 효돈동이 아닌 영천동 소속으로 분리되었다.
신효마을과 하효마을로 이루어진 효돈동은 한라산 남쪽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 서면 마치 산이 효돈동을 포근히 감싸주는 느낌을 받는다. 실제로 겨울에도 거의 눈이 내리지 않을 정도로 포근하여, 도내에서도 단위면적당 귤 수확량이 가장 많고 귤 맛도 으뜸으로 인정받는다.
2008년 초 기준으로 신효마을에는 약 650세대에 1850여 명이 거주하고 있고, 하효마을에는 약 1100세대에 3300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 두 마을은 초등학교, 중학교는 물론이고, 대부분 기관을 공유하고 있다. 이 두 마을은 동일한 설촌 역사와 생활양식을 공유하며 두 마을이 한 마을인 듯 생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