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꽃이 핀 길이 꿈길처럼 영롱하고 아름답다
안준철
칠판에 적힌 글씨를 보는 순간 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리고 갑자기 아이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방금 전 수업시간에 '서정적 자아'에 대해서 배운 아이들이 아닌가. 나는 한 아이를 붙잡고 흥분된 어조로 이렇게 물었다.
"너 전 시간에 서정적 자아에 대해서 배운 거야?""예?""서정적 자아 말이야. 선생님이 서정적 자아가 뭐라고 말씀하시던?""예. 그런 거 배운 적 없는데요?""무슨 소리야. 여기 칠판에 써 있잖아. 서정적 자아라고. 기억해봐. 선생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지.""…"그 아이는 수업시간에 딴 짓을 한 것일까? 그렇게만 볼일은 아닌 듯싶었다. 다른 아이들에게 물어봐도 대답할 생각은 안 하고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한 것을 보면.
나는 가끔 원어민에게 보여주기 위해 자작시를 영어로 번역할 때가 있다. 그런데 그 작업이 만만치가 않다. 내 알량한 영어 실력 때문만은 아니다. 앞에서 소개한 '가을 수업'이란 시를 영역하다가 중도포기를 한 것은 바로 다음 대목 때문이었다.
가을가실가슬갈, 갈바람 가을의 방언인 '가실'이나 '가슬'을 무슨 수로 번역한단 말인가. 지방 방언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누구 영어를 썩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경상도 방언인 '너캉 나캉 살자'라는 말을 한 번 번역에 보시라.
'너캉 나캉 살자'는 '너랑 나랑 살자'와 그 느낌과 맛이 사뭇 다르다. 하지만 영어로 번역해놓으면 그 독특한 맛이 사라지고 만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테지만 어떤 인사는 우리나라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내기 위해서는 애당초 영어로 번역이 가능한 글을 써야 한다고 했다던가?
하긴 나도 가끔은 그런 생각에 빠질 때가 있다. 말하자면 영어를 잘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배경을 지닌 필리핀 사람들이 부러운 그런 심리 말이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나 독일처럼 그들의 모국어가 확실히 알려진 나라가 아닌 스위스나 덴마크 같은 나라 사람들은 영어를 사용하고 있을 것 같은 막연한 생각이 들면서, 그것이 그 나라 발전을 위해서도 더 좋은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나는 화들짝 놀란다. 오직 한 가지 어족만 존재하는 바다를 상상해보라. 그 물고기가 아무리 영양이 풍부하여 인류의 건강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해도 다양성이 사라진 획일화의 세계는 얼마나 끔찍한 악몽인가.
최근에 한 교육계 인사가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경쟁을 시켜야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경쟁이 심화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우선 점수로 환산되지 않는 것들은 점점 가치를 상실하게 될 것이고, 그러다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다양한 아름다움들이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이미 그런 징조가 나타나고 있지만 모국어로 사색하는 아이들도 점점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것이 하나의 재앙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적다는 것은 위험하고도 슬픈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새가정>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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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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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캉 나캉 살자!"와 "너랑 나랑 살자!"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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