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만선 할아버지이 마을 노인회장을 역임하셨다. 이 섬에 대해 많은 증언을 들려주셨다.
장태욱
이 섬에 농토가 부족했을 텐데 과거에 곡식이 부족해서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했다.
"비양도는 땅이 비옥해서 농사는 잘 되는 편이야. 그런데 땅이 원채 부족해서 이곳에서 농사짓는 곡식으로는 3개월을 버티기 어려웠지. 이 섬에 많이 나는 것이 물고기, 소라, 전복인데 옛날에는 그것들을 팔아서 돈을 만들 판로가 없었어. 배고프면 해산물을 '금악'이나 '명월' 같은 산간 마을로 가지고 가서 곡식과 바꿔왔던 거지."윤 할아버지는 11살에 해방을 맞았다. 해방이 되기 이전에 이 섬에는 일본군 소대가 비양봉 중턱에 반공호를 파고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군이 이 섬에 주둔하는 것을 알아차린 미군 폭격기가 자주 이 섬 상공을 비행하면서 폭격을 가했다고 한다.
"일본군은 일본군대로 굴을 팠고, 주민들은 주민들대로 살기위해 굴을 팠지. 집집마다 가족단위로 굴을 팠어. 주민들은 자기들이 판 굴 안에 식량, 이불, 옷을 감춰뒀어. 우리 가족이 판 굴은 섬의 서쪽에 있었는데, 삼촌과 고모까지 모두 숨을 수 정도로 꽤 컸어.그런데 어느 날 미군 전투기가 폭격을 가해 오는 거야. 난 누나와 함께 몸을 숨기기 위해 우리 굴이 있는 곳으로 뛰었어. 그런데 나와 누나가 굴 입구에 이르기 전에 전투기가 바로 내 머리위에서 떠 있는 거야. '이제 죽는구나'하고 생각했지. 그런데 기관총을 난사하는 소리는 들려도 총알이 우리 쪽으로는 떨어지지는 않더라고. 폭격기 조종사는 (우리가) 불쌍했던지 차마 총을 쏘지 못했던 거야.그런데 우리 머리 위에 있던 그 폭격기가 갑자기 동쪽으로 날아가더니 한림항을 폭격했어. 순간 큰 소리가 나더니 시커먼 연기가 하늘로 오르는데, 정말 무섭더구먼."윤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일이라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미군 폭격기가 한림항을 공습한 날은 1945년 7월 6일이다. 당시 한림항에는 탄약저장고가 있었는데, 이날 폭격으로 탄약저장고와 함께 인근 민가 40호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자칫하면 이 날이 윤 할아버지 제삿날이 될 뻔했다.
당시 2차 대전에서 일본군과 독일군의 패망이 거의 확실해지고, 미군의 일본 본토에 대한 점령이 확실해질 즈음 일본군은 최후의 결전지로 제주를 선택했다. 제주도 전역을 군사기지로 만들고 관동군 제111사단을 비롯한 병력을 제주에 배치해 놓고 있었다. 일본의 의중을 알아차린 미군은 제주도에 배치된 일본군에게 폭격기와 잠수함을 동원해서 공격을 가했다.
한림항 폭격이 가하지기 이전인 1945년 4월 14일 미군은 잠수함을 동원하여 일본군 군함과 수송선을 폭격했다. 당시 중국 본토 작전을 지휘하던 일본군 수송선 수산환(壽山丸)과 삼택환(三宅丸), 해방함(海防艦) 31호, 해능미(海能美) 등의 군함이 병력을 수송하던 도중 제주 근해에서 미군 잠수함 '데이트란트'호에게 포착되었다. 일본 해군함정들은 미군의 공격을 피해 비양도와 한림항 사이로 대피하였지만 미군 폭격기와 잠수함 어뢰의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
"당시 폭격을 받은 일본 군함의 파편이 비양봉 정상에 떨어질 정도로 충격이 강했지. 죽은 일본군 시신들이 죽은 생선처럼 물 위에 떠다녔고…, 일본이 항복하기 전이라 일본군은 주민들에게 시신을 수습하라고 했어. 어민들이 배를 타고 다니면서 시신을 건져냈는데, 이 시신들을 땅을 파서 매장하거나 화장을 시켰어.그런데 당시 일본 수송선에 타고 있던 시신들은 대부분 물 밖에 떠다녔는데, 군함에는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서 배 안에 갇힌 시신이 많았던 것 같아. 해방이 되었을 즈음에 옹포리에 사는 어느 어민이 좌초된 군함을 뜯어서 고물로 팔 마음을 품고 군함에 접근한 다음 배의 수밀문을 열었는데, 안에 갇혔던 시신들이 수압에 의해 한꺼번에 위로 쏟아져 나온 거야. 고철을 뜯으러 갔던 그 옹포리 주민은 흉한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지 이듬해 병을 얻어서 죽었다고 해."해방이 되고 4·3의 광풍이 제주를 휩쓸었지만 비양도는 4·3의 회오리를 피할 수 있었다. 당시 마을에 좌익 사상을 가진 인사가 없었고, 외부와 고립되어 있어서 당국에게 의심받을 만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