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청화루를 나와 마당을 건너 극락전 법당으로 간다. 법당 안에는 목조아미타삼존불(전북 유형문화재 제201호)이 모셔져 있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는데, 작품의 예술성과 조형성은 그렇게 뛰어나 보이지 않는다. 이 불상이 언제 조성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고 한다.
사실 안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재는 영산회괘불탱(보물 제1267호)이다. 그러나 이것은 법회나 의식 등 행사 때만 사용하기 때문에 볼 수가 없다. 길이가 10.75m 폭이 7.2m나 되는 대형 걸개그림으로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그렸다고 한다. 문화재청의 자료 사진을 보니,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다보여래,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왼쪽에는 아미타불,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이 서 있다. 건장한 모습의 석가모니 부처님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강렬하다.
극락전 서쪽에는 천불전과 성보문화관이 있는데 이들 건축은 1992년 이전 이후에 지은 것으로 역사적인 가치는 없다. 단지 천불전의 현판이 의미가 있는데, 현대의 대표적인 서예가인 강암 송성용 선생이 썼다. 현판 왼쪽에 보니 1995년(乙亥) 4월초파일에 쓴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1998년 개관된 성보문화관에는 중국, 티벳, 태국, 미얀마 등 여러 나라의 불상과 탱화, 도자기 등 500여점의 불교문화재가 전시되고 있다.
적상산 사고
해발 1,000m 가까이 있는 안국사를 보고 우리는 다시 도로를 따라 적상산사고로 내려간다. 지난 번 안국사를 사전 답사했을 때는 안개가 안국사를 뒤덮었는데 오늘은 날씨가 상당히 좋은 편이다. 한 1㎞쯤 내려가니 왼쪽으로 적상산 사고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사고 쪽으로 가까이 가 보니 담장 안으로 두 채의 2층 누각이 눈에 띈다.
적상산 사고의 역사는 광해군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광해군 6년(1614) 적상산성 안에 처음 실록각을 짓고 1618년에 선조실록을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인조 12년(1634)에는 북쪽에 위치한 묘향산사고가 위험에 처하게 되자 그곳의 조선왕조실록을 이곳 적상산 실록각으로 이관하였다. 그리고 인조19년(1641) 선원각이 만들어졌고 선원록을 보관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승장청, 군기고, 화약고, 수사당, 문루 등이 있었으며 조선왕조실록과 선원록 그리고 의궤 등을 보관했다고 한다. 적상산 사고는 조선시대까지는 유지되었으나 1910년 한일합방 이후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이곳의 조선왕조실록이 규장각으로 이전된 후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상산 사고는 현재 적상호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1992년 적상산에 양수발전소가 만들어지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게 되었다. 1997년 호수 위 해발 860m 지점에 선원각이 먼저 복원되었고 1998년에는 실록각이 복원되었다. 이곳에는 현재 실록과 선원록 그리고 의궤의 복제본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실록 관련 기록화와 영상물, 영상과 디오라마 등이 있어 일종의 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다.
무주현(茂朱縣)의 상산(裳山)은 호남과 영남의 삼도(三道)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가장 높은 곳이 상암(裳巖)인데, 사면이 층암 절벽으로 몇 천 길이나 우뚝 솟구쳐 있다. 그 위에는 또 토산(土山)이 있어 절로 동부(洞府)를 이루고 있는데, 널찍하게 앞이 트인 가운데 주위를 빙 둘러 에워싸고 있으며, 그 사이에서 샘물들이 용솟음쳐 나와 한데 합치면서 폭포수를 드리우며 아래로 쏟아져 내리고 있다.
이 험준한 지세(地勢)를 이용하여 성을 만든 것이 어느 시대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현재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도 아래에서 부여잡고 올라갈 수 있는 길은 겨우 발을 디딜 수 있는 곳이 두세 군데밖에 되지 않고, 오직 북문(北門) 쪽으로 우회하는 잔도(棧道) 한 곳을 통해서만 속마(束馬)가 지나갈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밖으로는 또 길게 뻗은 산맥과 큰 내가 둘러싸 지켜 주고 있으니, 이 모두가 요새를 설치하고 병력을 배치할 수 있는 천혜(天惠)의 여건을 제공해 주고 있다 할 것이다.
그리고 감여가(堪輿家 풍수지리에 밝은 사람)가 방술(方術)을 가지고 살필 적에도 길지(吉地)의 조건에 들어맞는다고 극구 찬탄을 하곤 하니, 그 천험(天險)의 신비함이야말로 쉽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점이 있다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지리지(地理誌)를 살펴보더라도 전조(前朝)의 도통사(都統使) 최영(崔瑩)이나 아조(我朝)의 체찰사(體察使) 최윤덕(崔潤德) 모두가 진소(鎭所)를 설치해야 한다는 의논을 제기하였고, 여말(麗末)에는 또 삼도 안렴사(三道按廉使)가 왜구를 피해 이곳에 둔병(屯兵)을 했던 자취가 남아 있으니, 그러고 보면 상성(裳城)의 이름이 대체로 오래 전부터 전해져 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고 하겠다.
茂朱縣之裳山。當湖嶺三道之交。最高者爲裳巖。四面層壁。特起數千仞。上有土山。自成洞府。寬敞回抱。泉澗湧出。合爲瀑簾下注。其因險爲城。不知何代始也。自下攀援以上。則僅容跟蹠者二三處。惟當北門有回棧。可通束馬。外有長嶺大川環衛。皆可設關置兵。堪輿家揆以方術。亟稱其協吉。天險神祕。有未易名言者。據地誌。前朝崔都統瑩。我朝崔體察潤德。皆有設鎭之議。麗末。又有三按廉避寇屯兵之跡。則裳城之名。蓋久矣。(한국고전번역원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