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숙소, 연하천 대피소에서연하천 대피소 앞에 걸린 지리산 종주 지도를 보며 다음 날 코스를 따라가보고 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크게 지친 기색은 아니었습니다.
서부원
서둘러 아침 일찍 집을 나섰지만, 오전 9시가 훌쩍 넘어서야 이번 지리산 종주의 시작점인 성삼재 고갯마루에 닿았습니다. 천 미터가 넘는 고지인데다 산바람마저 거세 그곳에선 전혀 여름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신발끈을 묶고 배낭끈을 조인 채 사뭇 긴장된 얼굴로 아빠와 함께 하는 7살짜리 아이의 지리산 종주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잘 닦인 노고단 고개까지의 산행은 아이에게도 그저 몸을 덥히는 정도의 가뿐한 '산책'이었습니다. 채 1시간도 걸리지 않았고, 대개 한 번 쉬어가는 노고단 대피소도 못 본 채 지나쳤습니다. 노고단 정상이 잡힐 듯 가까운, 움푹 파인 이곳 노고단 고개가 지리산 종주의 공식적인 기점입니다. 여기부터는 지리산을 완전히 내려올 때까지 교행조차 어려운 좁은 등산로가 내내 이어집니다.
노고단 고개에서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가 만나는 삼도봉까지 2시간 20분 만에 주파했습니다. 이는 보통 성인의 산행 속도보다 조금 빠른 것입니다. 다른 곳에 비해 능선이 비교적 완만한 코스라지만, 녀석은 "잔뜩 겁먹었더니만 별 것 아니다"며 조금 쉬어가자는 아빠의 제안마저 뿌리치고 앞서 나갔습니다.
뱀사골 계곡이 시작되는 화개재에 다다라 준비해 온 김밥을 꺼내 먹었습니다. 산행을 시작한 지 4시간, 힘들고 배가 고플 때도 됐 건만 아이는 여전히 성성합니다. 그러고 보니 임걸령에서 마신 물 몇 모금 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이곳 화개재까지 내달렸습니다. 햇빛이 사라진 우중충한 날씨 탓이라고는 하지만, 녀석의 발걸음은 아빠의 체력과 경험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가벼웠습니다.
여기서부터 토끼봉에 이르는 능선은 길고도 가파른 오르막입니다. 사실 첫째 날 일정의 최대 고비이며, 녀석의 '자만심'을 일거에 날려버릴 수 있는 시험대인 셈입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30분여를 쉬지 않고 올라서야 하늘과 맞닿을 수 있었습니다. 그제야 만만치 않음을 알았던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습니다.
성냥갑 같은 산 속 대피소에 몸을 누이다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하늘이 까매졌습니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옷과 배낭이 시나브로 젖어드는 축축한 날씨에 몸이 천근만근이 돼가고 있었습니다. 다리의 힘이 풀린 데다 물기 머금은 돌너덜에 자주 미끄러지다 보니 발이 삐고 넘어지는 위험한 상황도 많았습니다.
언제부턴가 녀석의 조잘거리는 입에서 말이 쏙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만큼 힘이 든다는 방증입니다. 능선 아래 산자락은커녕 바로 앞도 잘 보이지 않는 뿌연 등산로는 길고도 지루했습니다. 짓궂은 날씨는 아이의 지리산 종주 시도를 더욱 무모한 것으로 여겨지게 만들었습니다.
쉬어가자는 말조차 하기도, 듣기도 귀찮아하기를 두 시간, 가까스로 첫째 날 밤을 보내야 하는 연하천 대피소에 닿았습니다. 배낭을 내려놓자마자 저녁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반찬이래봐야 즉석 식품 두어 가지가 고작인 단출한 식사지만, 지쳐 허기진 까닭인지 아이는 밥알 한 톨 남기지 않았습니다. 반찬 투정은커녕 밥 먹는 모습이 게걸스러워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밥도 밥이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이가 7살이 되도록 우리 부자, 단 둘이서 외박하기는 처음입니다. 늘 엄마 곁에서라야만 잠들었던 녀석이 아빠와 나란히, 더욱이 낯설고도 비좁은 성냥갑 같은 깊은 산 속 대피소에서의 밤에 적응하기란 어려웠을 겁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오줌 마렵다며, (몸은 피곤한데) 잠자리가 불편해 잠이 잘 오지 않는다며 아빠에게 징징거리길 수차례, 자정이 다 돼서야 간신히 잠이 들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대피소 밖을 내다보니, 산 전체를 덮어버린 시커먼 구름이 외려 또렷하고 안개비 소리마저 요란스럽게 들렸습니다.
# 2008. 08. 18. 둘째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