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좌파’는...그래도 다시 희망을 품는다

[서평]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 좌파의 파열음을 끌어안은 한 지식인의 고뇌

등록 2008.08.22 12:14수정 2008.08.22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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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나는 좌파다> 겉그림. 베르나르 앙리 레비 지음.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겉그림. 베르나르 앙리 레비 지음.프로네시스
▲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 겉그림. 베르나르 앙리 레비 지음. ⓒ 프로네시스

교조적 사회주의를 비판하면서 ‘신철학’을 주장했던 베르나르 앙리 레비(1948~ )는 1977년에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을 첫 작품으로 내놓았다. 그로부터 삼십 년이 지난 2007년에 그는 다시 자기비판이기도 한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베르나르 앙리 레비 지음/프로네시스, 2008)를 내놓았다.

 

실천하는 좌파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으로서 레비는 그가 철저히 지키려 노력했던 가치들을 다소 쓸쓸하게 곱씹어보는 것으로 첫 장을 도배했다. 그리고 비판 가득한 역설과도 같은 희망으로 책을 마무리하기까지 자기 자신을 일으키듯 좌파(지식인)들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끙끙 앓는 희망, 길 잃어버린 가치, 모순에 모순을 거듭하는 이념의 혼란 등등 그에게 프랑스 좌파의 울타리는 찢길 대로 찢겼고, 무너질 대로 무너졌다. 그의 복잡한 고민들은 마치 철저한 파괴를 통해 다시 철두철미한 건축을 시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옮긴이는 이 책이 “거의 폭력에 가까운 다양하고도 많은 정보”를 지니고 있다고 평했다. 이것은 그만큼 (프랑스)좌파의 정체성 혼란에 대한 레비의 비판 수준이 높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책은 실천하는 좌파 지식인을 자처하는 레비가 이 시대 앞에서 낱낱이 드러내는 자기고백이기도 하고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떠날 수 없는 ‘가족’인 좌파를 향한 영원한 애정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실천하는 좌파 지식인을 자처하는 레비가 끝없는 좌파의 혼란과 시대의 고민에 대해 일종의 대안을 내놓는 과정을 철학적 고민과 함께 드러내고 있다.

 

레비의 고백과 확신, 좌파의 유산은 '흘러간 노래'가 아니다

 

하지만 예고했던 대로 니콜라 사르코지가 당선되자마자 정부 조직을 위시해 여러 위원회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수많은 자리에 좌파 인물들을 마구 끌어들이는 인사를 단행하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애석하게도 권력의 부름을 받은 대부분의 좌파 인사들이, 아니 거의 모든 좌파 인사들이 사르코지의 호소에 긍정적으로 답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프랑스 공화국 역사상 그 전례가 없는 기회주의, 조급증,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라에 봉사하려는 욕망 혹은 시대정신이라는 면에서 정치적 회의주의와 정치적 신조의 부재등이 포함된 지리멸렬함 따위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사실을 차치하고라도 나는 여전히 "좌파에 속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믿어왔고, 또 아직도 그렇게 믿고 있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무엇인가?"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 33p)

 

이 책은 마치 좌파 변증서와도 같은 책이다. 책은, 현 프랑스 대통령인 사르코지가 당선 가능성을 높여가던 시기 어느 날에 레비가 그와 나눈 씁쓸한 전화 통화 후에 시작되었다. 그는 책을 집필하기 시작한 때가 2007년 1월 23일이라고, 마치 작은 것 하나라도 뚜렷한 증거로 남기려는 것처럼 그 날짜를 기록하는 것으로 이 책을 시작했다.

 

앞서 말한 전화 통화에서 좌파의 혼란을 비아냥거리듯 지적한, 그러나 얼마간 확실한 증거를 대며 좌파 비판을 쏟아낸 니콜라 사르코지에게 레비가 내놓은 최종 답변은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였다. 그리고 그 빈약해보이는 답변에 관한 이유를 찾고 그 확실한 증거를 찾아가며 결국에는 좌파의 재기를 부르짖는 과정을 담은 것이 바로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이다.

 

레비는 거울 앞에 낱낱이 드러난 좌파의 우울한 현실을 끌어안고 좌파의 유산으로 거슬러갔다. 현실을 부정하고 과거로 도피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레비는 프랑스 좌파의 유산을 파고들었고 또 굳이 좌파의 현실 앞에 내던졌다. 그것은 무너진 확신과 길 잃은 가치를 다시 일으켜 세울 토대를 재형성하는 일이었다.

 

프랑스 좌파의 정체성을 다시 세우기 위해 그가 제시한 프랑스 좌파의 정신적 유산은 드레퓌스 사건, 비시 정부, 알제리 전쟁, 68혁명에서 비롯된다. 그는 이 네 가지 사건에서 각각 인권 수호, 반파시즘, 반식민주의, 반전체주의 등 4가지 요소가 프랑스 좌파가 얻은 교훈으로 자리잡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네 가지가 서로 모순을 일으킬 때 바로 좌파의 정체성이 혼란을 일으킨다고 설명한다.

 

프랑스만큼이나 우울한 좌파의 현실을 여전히 바라보는 한국에서 그의 말은 곧장 주목을 받기가 쉽지 않다.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한 지난 해의 기억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우울한 고백이 치밀한 분석과 그에 따른 이유있는 확신으로 이어졌기에, 좌파의 유산을 다시 딛고 선 그의 말이 점점 힘을 받는 듯하다.

 

달리 말해, ‘나자빠진 거대한 시체’(원제)가 ‘좌파의 몰락’(인터내셔널판)을 딛고서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한국판)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그 엄청난 분량으로 쏟아내는 레비의 고백과 분석, 그리고 오뚝이 같은 재기 의지를 새삼 다시 바라볼 이들이 많지 않을까 싶다. (원제인 '나자빠진 거대한 시체'는 1960년에 사르트르가 절친한 친구인 폴 니장의 소설 <아덴 아라비>의 서문에서 사용한 말이다.)

 

우울한 프랑스 좌파의 현실을 잠시 뒤로하고 좌파의 유산을 조목조목 다시 살피는 데 힘을 쏟은 그가 좌파의 내일을 기약하며 제시한 주의사항은 반자유주의, 반미주의, 반유대주의, 파쇼이슬람주의, 그리고 보편성의 위기 등이다. 이들은 각각 그 반대쪽 문제와 맞닿아 있는 듯하다.

 

예를 들어, 그는 반미 또는 반자유주의를 지나치게 추구하다가 개별 민족, 개별 국가의 문제점들에 이중 태도를 보이는 현상을 지적한다. 달리 말해, 좌파가 그 반대편과 분명한 차이를 두려다가 또는 그 논쟁에 집중하다가 각각의 현실이 지닌 복합적인 문제들을 제대로 살피지 못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한편, 좌파의 재기 발판을 마련하는 일 역시 이러한 오류를 바로잡는 데서 출발한다. 그는 이러한 오류를 바로잡고 가치와 현실을 잘 조화시킬 때 좌파의 유산을 제대로 되살릴 수 있다고 본다. ‘감상적 좌파’가 아닌 ‘우울한 좌파’가 되길 바라는 레비의 희망은 이렇듯 언뜻 침울해 보이지만 그만큼 철저한 분석에서 비롯되었다.

 

프랑스 좌파를 향한 애정과 고민이 한국 사회에 곧바로 적용되기는 힘들다. 극우와 극좌 사이에도 다양한 이념 노선을 보유한 프랑스 사회는 그 점에서부터 한국 사회와 다르다. 역사 경험에서도 한국과 프랑스는 결코 같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한국 사회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좌파의 정신적 유산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비판을 거쳐 이를 다시 좌파의 우울한 현실에 적용하려 한 그의 실천적 고민에서 나온다.

 

적어도 그의 이런 실천적 고민만큼은 한국 사회에도 적용할 만하다. 이념상 좌파든 아니든 간에, 가치의 전복 또는 가치의 쏠림 현상을 겪는 한국사회에서 레비의 철저한 자기비판과 분석, 그리고 대안 제시는 그 과정만으로도 설득력을 지닌다. 그렇다면, 이러한 과정을 확실히 밟아가기 위해 거의 홍수에 가까운 분량으로 제시한 갖가지 인용과 비유를 조금은 넉넉히 이해해주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 지음. 변광배 옮김. 프로네시스, 2008.
(원제) Ce Grand Cadavre Á La Renverse by Bernard-Henri Lévy(2007)

2008.08.22 12:14ⓒ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 지음. 변광배 옮김. 프로네시스, 2008.
(원제) Ce Grand Cadavre Á La Renverse by Bernard-Henri Lévy(2007)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 지음, 변광배 옮김,
프로네시스(웅진), 2008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 #프로네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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