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등정미소 정문과 경비실. 경비실 뒤편에 몇 겹의 붉은 벽돌로 쌓은 쌀 창고의 벽이 눈길을 끕니다. 붉은 벽돌로 견고하게 지어진 창고 벽이 일제의 식량 수탈이 얼마나 치밀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조종안
선조들의 애환이 서린 가등정미소는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술 원료인 주정을 만드는 회사(한국주정)로 바뀌었고, 60~70년대에는 '우풍화학'과 '한국플라스틱' 공장이 들어섰습니다. 그러다 80년대부터는 최루탄 원료를 만드는 공장이 재미를 보다, 민주정부가 들어서면서 가동을 중지했고 지금은 건물이 모두 헐리고 정문과 경비실 그리고 창고 벽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고구마를 주정으로 만드는 재료로 썼던 60년대에는 고구마 찌는 냄새가 강냉이 죽과 수제비로 끼니를 연명했던 사람들의 코를 놀리기도 했는데요. 지금은 모두 추억이 되고 말았습니다. 전두환·노태우 물러나라는 시위로 최루탄을 가장 많이 소비했던 80년대에 회사가 가장 잘 돌아갔었다고 하니 민족의 애환이 담긴 역사의 현장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입니다.
금암동에 위치한 가등정미소는 째보선창으로 흘러드는 샛강을 끼고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일출동'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른들이 일출동이라고 부르는 게 궁금해서 어머니에게 묻기도 했는데요. 일제 36년 치욕의 상처를 치료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왜놈들이 조장한 미두(현물 없이 쌀의 시세로 거래하는 투기)와 고리대금업으로 순식간에 전답을 잃고 몰락, 삶의 근거지를 잃었던 조선 백성들은, '조선경제발전'의 논리를 앞세운 수법이 하도 정교하여 일제에 의해 시혜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경제'를 내세워 언론을 장악하려는 현 정부가 오버랩 되는데요. 째보선창에서 쌀장사를 하는 어머니와 집에 놀러 오시는 동네 어른들이 '그래도 왜놈들은 근검절약했다'라고 평가해 이상하게 생각했는데요. 이는 잘못된 역사 교육의 영향 때문이란 생각입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게 하나 있는데요. 일인들에 대한 명칭입니다. 이준 열사와 안중근 전기를 읽으며 분개하면서도 명칭은 학교에서 배운 대로 '일본', '일본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잡초 인생들이었던 동네 어른들은 '왜국', '왜놈'이라고 부르더라고요. 그분들도 배운 대로 사용했을 터, '조선 백성들에게 왜(倭)만 있었지 일본(日本)은 없었다'라는 어느 교수의 말이 떠오르면서 왜놈들의 조선인 교육 말살정책에도 민족정신만은 뚜렷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주정공장', '우풍화학'이 더 귀에 익은 가등정미소 정문은 저녁밥만 먹으면 동네 친구들이 모여 '편술래'(편을 갈라 하는 술래잡기)를 하던 놀이터이기도 했습니다. 경비실 아저씨가 시끄럽다며 불을 꺼버리는 바람에 일찍 집에 들어오는 날도 있었는데요. 그래도 통사정을 하면 불을 밝혀줄 때도 있어 밤늦도록 놀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정미소 거리'의 중심지였던 '호남제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