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2일 서울남부지법의 국민참여재판에서 슬라이드를 이용해 증인에게 질문하고 있는 검사(서있는 사람)와 이를 듣고 있는 피고인(맨 오른쪽)
박근용
이번 재판은 피고인의 입장, 아니 피고인을 변호해야 하는 변호사의 입장에서는 참 어려운 사건이었다. 당시 사건현장이 지하철역 앞 길에 설치된 CCTV 화면에 찍혔기 때문이다.
일정 시간 단위로 CCTV의 촬영 방향이 90˚씩 바뀌기 때문에 전 과정이 다 녹화된 것은 아니었지만, 피해자가 술 취한 채 사건현장에 서 있던 모습, 피고인이 황급히 피해자가 있던 곳으로 뛰어가는 모습, 쓰러져 있는 피해자의 머리를 오른발로 심하게 내리치는 장면, 그리고 바닥에 완전히 쓰러진 피해자를 두고 피고인이 사건현장을 벗어나던 모습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이 모든 화면을 11명의 배심원(2명은 예비배심원)들이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오 세상에! 이런 자료가 나왔는데, 변호인이 어떻게 방어할 수 있을까! 게다가 피해자의 어머니가 방청석에 앉아 있다가 피해자의 엉망진창이 된 얼굴사진이 증거로 나왔을 때, 법정안의 모든 사람이 들을만큼 큰 소리로 탄식했으니, 배심원들의 마음이 어찌 피고인에게 기울겠는가.
그순간 판사는 피해자 어머니에게 감정을 자제하기 어려우면 법정 밖으로 나갈 것을 권했다. 하지만 피해자 어머니는 조심하겠다면서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피해자 어머니와 그 친척들은 피고측 변호인이 살인의 고의가 없었다고 주장을 펴는 중간중간 변호인을 향해 작지만 강렬한 욕설을 하기도 했다.
방청석에서 이들의 뒤에 있던 나는 이를 자세히 들었는데, 배심원들이 이를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워낙 조용한 공간이었기 때문에 방청석에 가까운 배심원이 들었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재판장의 말을 막고 싶었다피고인과 변호인에게 마냥 불리해 보이기만 한 재판은 저녁 8시가 넘어서 재판장이 이제 배심원들의 평의시간임을 알림으로써 한 매듭지어졌다. 그런데 여기서 잘못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을 재판장이 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많이 늦어졌는데, 배심원들께서는 1시간 이내에 평의를 마치고, 유죄가 인정된다면 15~20분 정도 양형에 대해 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 재판장(한창훈 부장판사)이 말을 듣는 순간 난 재판장의 말을 막고 싶었다. 배심원들에게 충분한 토론시간을 보장해주지는 못해도, 배심원 평의를 1시간 정도, 양형 토의는 20분 정도 안에 마쳐달라고 부탁하다니. 재판부를 구성한 3명의 판사들끼리는 이미 유무죄에 대해 웬만큼 합의에 이르렀는지 모르겠지만, 단 한 가지의 의심이라도 있다면 그 의심이 합리적으로 풀릴 때까지 충분히 토론하고 상호비판을 해야 할 배심원들에게 시간 제약을 주다니.
물론 재판장의 말은 그 시간까지 끝내라는 강제성 있는 표현은 아니었다. 이미 시간이 늦었으니 배심원들이 너무 힘들고 지칠까 봐 또는 심야시간이 되면 생길 다른 부담을 걱정해서 한 말로, 가급적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한다는 권고적 말이었다.
그렇다 해도 이는 명백한 잘못이다. 재판시간을 잘못 예상하여, 배심원 평의가 저녁 8시를 넘어 시작되게 한 책임은 분명 공판준비를 잘 못하고 공판과정을 효율적으로 진행 못한 재판부의 책임이다. 그런데 유무죄를 배심원들이 최대한 신중하게 토론해줄 시간을 피고인이 보장받지 못하고, 또 배심원들이 진실을 찾아가기 위해 토론하는 권한을 충분히 발휘할 시간을 보장받지 못 하다니. 이럴 수가. 판사의 부담과 판사의 잘못을 배심원과 피고인이 분담해야 하나?
만약 판사들에게 국민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앞으로 하루 안에 재판을 결론내고 판결문을 만들어라 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판사가 심사숙고할 시간을 빼앗았다", "판사의 재판권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신속한 재판도 좋지만 법리와 사실관계에 대한 충분한 검토를 통해 진실을 규명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말이 막 쏟아질 것이다.
비록 아직은 최종 결정권을 부여받지 못한 배심원들이지만, 판사와 동급으로 대접받아야 할 배심원들에게 유무죄를 결정할 시간을 '1시간'으로 제한하는 식의 말을 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이다.
30분 더 토론했다면 결론이 다르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