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원사지 당간지주큰 딸 아이는 초록의 풀밭에 당당하게 초연히 서 있는 당간지주 앞으로 조금씩 조금씩 이끌려 갔다.
이성한
너른 초원 한 복판 뭉게구름 가득한 파란 하늘을 향해 보원사지 오층석탑이 가야산과 상왕산 사이의 틈새를 찌를 듯, 가를 듯 날아오르는 것처럼 서 있었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적통을 이어받은 맵시와 안정감이 몸돌과 지붕돌에 고스란히 묻어나는 흔적이 여실히 느껴졌다. 나는 탑이 주는 절묘한 대칭과 균형의 황금비례를 바라보며 평소 들쑥날쑥한 격변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작은 깨달음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집 세 여자와 보원사 절터 곳곳을 천천히 걸으며 돌아보았다. 절 터 맨 뒤쪽으로 보이는 법인국사의 부도와 부도비를 살펴볼 수 있는 점도 좋았다. 나는 아내와 작은 아이를 보원사지 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르는 시원한 냇가에 잠시 쉬도록 남겨두었다. 물가 옆으로 바람에 하늘거리는 초록의 갈대가 싱그러웠다. 나는 큰 딸 아이를 데리고 오층석탑과 일직선상으로 서 있는 보물 제103호 당간지주 앞으로 걸어갔다.
밭 한 가운데 늘씬하면서도 당당하게 서 있는 당간지주의 온전한 직립이 인상적이었다. 큰 딸 아이는 저도 모르게 끌렸는지 당간지주 앞으로 조금씩, 조금씩 다가서고 있었다. 나는 초록의 풀밭 위에 세월과 역사를 머금은 채 초연한 모습으로 서 있는 당간지주와 딸아이의 말 없는 대화를 조용히 뒤에서 지켜보았다.
용현계곡을 빠져나와 상왕산의 개심사로 향했다. 운산 삼거리에서 ‘해미’ 방면을 향해 달려 온 지 10분도 채 안 된 시간에 개심사 입구 일주문에 도착했다. 여전히 식을 줄 모르고 맹위를 떨치는 한낮의 뜨거움이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서서히 더위에 지쳐가고 있는 우리집 세 여자들도 개심사로 향하는 언덕을 오르며 징징거리지만 웃음을 잃지 않고 있는 모습이었다.
“마애불을 알현하고 나니 세 여자의 마음이 삼존불처럼 자애로워진 걸까?”일주문을 지나 개심사로 진입하는 입구에는 두 개의 선돌이 놓여 있었다. 한자로 쓰여진 오른쪽은 마음을 연다는 개심사(開心寺)였고, 왼쪽은 마음을 닦는 동네 세심동(洗心洞)이었다. 그러니까 마음을 열고, 마음을 닦을 준비를 하고 들어서야 하는 것이 개심사의 출입조건이자 출입자의 자격인 듯했다.
얼마간 약간의 언덕배기를 올랐다. 나무 그늘 속을 쉬엄쉬엄 올라 오솔길 모퉁이를 슬쩍 돌아서니 긴 네모꼴의 연못이 잔잔한 자세로 거기 있었다. 아기자기한 개구리밥과 수련의 조화로운 공생이 내 눈에 친근하게 들어왔다. 낮은 물 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비단잉어의 자유로운 유영도 무척 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