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경묘 원경
이상기
준경묘에 묻힌 사람이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양무(陽武)라고 한다. 양무장군은 전주이씨 17세로 고려시대 내시집주를 지낸 린(璘)과 남평문씨 사이에 태어났다. 세 살 때 아버지 린이 길성(현재 길주) 땅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이후 경산(현재 경성 또는 경흥)을 거쳐 안남 땅으로 오게 되었다. 양무는 안남에서 자라 장군이 되었으며 상장군 이강제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넷을 두었다고 한다. 그들이 안사(安社), 영필, 영밀, 영습이다.
그 중 첫째인 안사가 조선 개국 후 목조로 추존되는 태조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이다. 안사에 대한 이야기는 <완산실록>에 나오는데, 그는 성품이 온화하였다고 한다. 대대로 무인 기질을 물려받아 호방했다고도 한다. 그러다 보니 전주지방을 다스리는 지주사(知州事: 지방관)와 불화를 겪게 되었다. 불화의 발단은 관기를 두고 벌인 싸움이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흥왕정기설(興王精氣說) 때문이었다고 한다.
안사는 180여 가구를 이끌고 강원도 삼척 땅으로 이주를 해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런데 몇 년 후 전주의 지주사가 관동 지방의 안렴사가 되어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에 안사는 다시 170가구를 이끌고 함경도 덕원의 남면 용주리로 다시 피신했다고 한다. 그러나 또 다른 박해를 걱정한 안사는 함경도 경흥 땅에서 30리 되는 두만강 유역의 알동(斡東)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5000호를 다스리는 원나라의 다루하치(達魯花赤)가 된다.
이상이 소위 정사인 <완산실록>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양무장군이 삼척땅 미로면 활기리 산골에 묻혔을까? 양무장군의 아들인 안사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만 양무장군에 대한 이야기는 적어 확인하기 어렵다. 더욱이 그의 무덤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다. 그렇다면 준경묘와 관련된 이야기는 후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준경묘가 양무장군의 묘라는 확실한 근거는 없다. 준경묘가 양무장군의 묘가 확실하다면 조선을 개국하고 나서 바로 묘역에 대한 정화사업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 초에는 논의도 되지 않다, 중기에 논의되기 시작해서 500년이 지난 1899년에야 양무장군의 묘로 결정되었다는 것은 뭔가 석연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경묘는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고종황제에 의해 태조 이성계의 5대조 양무장군의 묘로 확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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