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그림그림을 사랑한 아이 '고아명'과 '고차매'네 이야기를 다룬 소설 <로빙화>입니다.
양철북
지난밤 드문드문 세찬 바람이 불다가 잦다가 비가 오다가 그치다가 하더니, 깊은 밤에는 비가 뚝 멎었습니다. 모기장을 쳐 놓았어도 모기는 모기장 안으로 어떻게든 들어와서 피를 빨아먹으려고 하고, 우리는 피를 빨리면서도 모자란 잠을 이루려고 바둥바둥입니다.
새벽 어스름이 조금씩 걷힐 무렵, 모기장 안쪽에 있는 모기가 눈에 띄여서 한 마리 두 마리 …… 열 마리 남짓 잡습니다. 희뿌윰이 밝아오는 창밖을 보며, 이제 일어날까 하다가, 오늘 낮 부지런히 다녀야 할 일을 생각하며, 아니다 잠깐이라도 몸을 푹 쉬고 하루를 맞이하자며, 생각을 고쳐먹습니다.
여느 날보다 퍽 느즈막한 일곱 시 반쯤 일어납니다. 낯과 몸을 씻고 빨래 한 점을 하는데, 씻는 방 창밖으로 매미소리 들립니다. 나무도 없는데 무슨 매미가 우나 하고 내다보니, 이웃한 빈 건물 벽에 붙어 있는 듯합니다.
어디께 있나 두리번두리번하는데 매미소리 뚝 끊깁니다. 사람 냄새를 맡았나 봅니다. 몸을 다시 웅크리며 빨래를 합니다. 아까보다 가늘어진 매미소리 울립니다. 다시 몸을 움직여 슬그머니 내다봅니다. 또 끊깁니다. 그래, 미안하다, 애써 세상으로 나와서 시원하게 울어 보려는 참에 내가 괴롭혔구나, 난 살며시 나갈 테니 마음껏 울어라.
다 한 빨래를 탁탁 털고 씻는방에서 나오니 이윽고 매미소리 다시 들립니다. 굼벵이가 고이 깃들며 지낼 만한 흙이 마땅하지 않은 도심지요, 온통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발려진 동네인데, 저 매미는 어디에서 몇 해 동안 웅크리고 있다가, 이처럼 때맞춰 깨어나서 큰소리로 울어댈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 정말 아명의 그림이 좋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막내 아생은 아명이 그린 그림들을 벽에 붙였다. 벽에 건 그림만도 이미 열 장이 넘었지만, 한 장 한 장 모두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는 괴상한 것들뿐이었다. 게다가 학교에서 그린 그림들 위에 선생님이 찍어 준 '미'라는 도장은, 보는 사람들을 오히려 민망하게 했다 .. (22쪽)엊저녁, 옆지기는 매듭엮기를 하고 저는 책을 읽습니다. 옆지기가 심심하다며 책을 소리내어 읽어 보라고 합니다. 무슨 책을 읽을까 하다가 <잃어버린 소년들>이라는 책을 읽는데, 마침 펼쳐서 읽는 대목이 꽤 지루합니다. "이거 원, 읽는 사람부터 재미가 없네."
엊그제 헌책방 나들이를 하며 장만한 <이경희-현이의 연극>(1973)이라는 퍽 묵은 수필책을 집어듭니다. <여치>라는 글이 보입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여치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어제 점심때, 친구와 같이 어느 식당에 갔더니 그 식당 입구 양쪽에 대로 만든 여치 둥우리가 걸려 있었다. 시원한 울음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나는 무의식중에 '어마!' 하고 감탄의 소리를 질렀다. 한참 동안 잊고 살아온 여름벌레! 그리운 것을 만난 것같이 반갑고 정이 갔다(98쪽)"는 첫 대목.
응, 여치 울음소리? 음, 여치 울음소리.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떤 소리였지? 메뚜기며 여치며 방아깨비며 풀무치며 여름벌레 울음소리는 모두 다른데, 어느 소리가 어느 벌레 울음인지 가려낼 수 없으려나? 하긴, 이제 이 여름벌레를 아예 찾아볼 수도 없는데, 울음소리를 어찌 가려내나.
듣느니 참새와 비둘기와 까치 울음소리일 뿐인데, 소쩍새와 왜가리와 갈매기와 새매와 어치와 콩새 울음을 가릴 수 있는 도시내기가 다문 몇 사람이라도 남아 있으려나. 이 새소리를 가려낼 수 있다고 하여도, 이이는 도시에서 알맞는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까. 한 번 들여놓고 살아가는 이 도시라는 데에서는 벌레소리며 새소리며 짐승소리며 바람소리며 모두 잊어야만 하지 않나.
<현이의 연극>을 쓴 아주머니는 "언젠가 들은 얘기지만, 도오쿄오 중심지에서는 나비를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어쩐지 사실 같지 않았으나, 요즘 서울에서도 나는 나비를 본 기억이 까마득한 것 같다(100쪽)"고 적습니다.
나비를 볼 수 없는 서울, 아니 나비를 볼 수 없는 한국. 산에 가야 볼 수 있을 텐데 산이라고 해 봐야 케이블카 놓고 아스팔트길 닦고 굴을 뚫고 갖가지 밥집에다가 호텔 모텔 지어대고 스키장 무슨 장 우격다짐으로 때려넣는데 …….
.. “교장 선생님이 현에서 여는 미술 대회에 참가한다고 하셨어요.” “그래? 그럼 네가 대표로 뽑혔다는 말이냐?” “예! 누나도 대표예요. 앞으로 날마다 남아서 연습을 해야 돼요.” “네 누나도 연습을 한다고? 그건 안 된다. 네 누나는 엄마 일을 도와야 해.” …… 차매는 갑자기 자신이 그림에 아주 관심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술 지도 시간에 대한 미련을 쉽게 버릴 수 없었지만, 엄마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래! 엄마는 그렇게 바쁘신데……. 나라도 일찍 집으로 가서 조금이라도 도 도와 드려야지. 아마도 이렇게 하는 것이 그림을 그리는 일보다 가치 있는 일일 거야 .. (45, 72쪽)지지난달, 옆동네 화평동으로 골목마실을 갔다가 배추흰나비를 보았습니다. 그 비슷한 무렵, 서울에 있는 ㅇ출판사로 나들이를 갔다가 그 출판사 앞마당에서 노니는 배추흰나비를 보았습니다.
골목길 한켠 빈자리를 그냥 놀리지 않고 흙을 일구고 갈고 거름을 치면서 땅심을 돋워 준 다음 여러 가지 푸성귀를 심으니, 벌과 나비가 찾아듭니다. 조금만 벗어나면 자동차 우악스럽고 시끄럽게 내달리는 서울 한복판이었으나, 출판사 앞마당에 자라는 나무와 꽃을 밀어내지 않고 그대로 간수했기에 외로운 나비 한 마리가 이곳에서나마 날개를 접고 쉴 수 있습니다.
옆동네 율목동 할머님도 걱정을 하지만, 온 인천을 재개발을 한다며 갈아엎으면, 그나마 골목이 어우러져 있는 조용한 동네에서 마음좋은 사람들한테 밥술이나마 얻어먹던 길고양이와 길개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싶습니다. 우리들 사람도 그 비쌀 뿐더러 메마르고 매몰찬 시멘트 성냥갑에 들어갈 수도 없고 들어가기도 힘들지만, 여태껏 뿌리내리며 조용히 살아오던 나무와 꽃과 풀도 싹 목아지가 잘리며 쓰레기 대접을 받아야 하나요. 서른 해를 묵은 동네 감나무가, 쉰 해를 묵은 동네 느티나무가, 스무 해를 묵은 동네 앵두나무가, 마흔 해를 묵은 동네 은행나무가, 해마다 새로 줄기를 뻗는 담쟁이와 나팔꽃과 호박꽃과 해바라기가, 한 줌 재로 바뀌며 제 삶터를 내어주고 숨을 거두어야 하나요.
.. “주사? 하하하! 아니 무슨 주사를 놓는다는 거냐?” “쥐약을 먹었으니 해독제를 맞으면 금방 나을 거예요.” “흥! 그깟 한 푼 값어치도 없는 고양이 한 마리 살리자고 귀한 돈을 날리자는 말이냐?” 분명 맞긴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아명은 아버지가 고양이와 돼지를 차별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 같이 사랑스러운 동물이 아닌가? 게다가 돼지에 비하면 고양이가 훨씬 더 사랑스럽지 않은가. 사랑하는 고양이의 생명을 돈으로 계산하는 것을 아명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노기 띤 그 말에 아명은 희망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더는 기댈 데가 없어진 아명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런, 쳐죽일! 왜, 뭐 때문에 울어? 당장 그치지 못해?” .. (100∼101쪽)요사이, 서울이나 인천이나 웬만한 도시마다 자동차 물결이 조금 수그러들었다고 합니다.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달리노라면, 예전과 견주어 차가 꽤 줄었음을 살갗으로 느낍니다. 차가 줄어 널널해지니 짓궂고 거칠던 버스기사도 자전거한테 조금 더 마음을 기울여 주지 않나 하는 느낌도 듭니다.
그런데 ‘줄어든 자동차 물결’은, ‘이 땅 이 나라 자연 삶터가 무너지는 일을 걱정’하면서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기름값이 부쩍 치솟아서 돈 나가는 일이 걱정’되어서 줄어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대중교통을 타는 까닭은 ‘자가용 끌고 가 보았자 막히기만 하니 늦어질 뿐더러, 차 댈 데가 마땅하지 않아서’입니다. 조금이라도 지구자원을 덜 쓰면서 이웃과 우리 모두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사람뿐 아니라 자연 목숨붙이를 아끼거나 돌보려는 마음이 아닙니다. 돈, 돈, 오로지 돈 때문입니다. 돈 때문에 일을 하고, 돈 때문에 사람을 만나며, 돈 때문에 처세와 자기계발서라는 뚱딴지 같은 이름을 달고 나오느 책을 부지런히 읽습니다. 돈 때문에 자가용을 끌면서 다니려 하고, 돈 때문에 내키지 않는 술자리 대접을 할 뿐더러, 돈 때문에 검은돈을 봉투에 담아서 선물로 바칩니다.
돈을 바라보며 대학교에 보내려 합니다. 돈을 생각하며 아이들한테 영어와 한자를 가르칩니다. 돈을 꿈꾸며 아이들한테 책을 읽힙니다. 돈 나와라 뚝딱 하는 마음으로 아이들한테 ‘논술시험 대비 글쓰기 교육’을 시킵니다. 돈이 구르기를 바라면서 아파트를 장만하고, 내 주머니에만 돈이 차기를 꾀하니 주식을 하고 펀드를 놓습니다.
.. 임장수의 외아들은 임지홍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끔찍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불면 날아갈세라 쥐면 꺼질세라, 날씨가 조금만 추워도 옷을 껴입혔고, 비타민을 비롯해 몸에 좋은 것이라면 억지로라도 먹일 정도였다. 하지만 임지홍은 창백한 얼굴에 몸이 쇠약한 아이로 자랐다 …… 이번에 임지홍에 맞설 만한 강적이 나타난 것과, 그 주인공이 자신의 차밭 가운데 아주 일부를 부치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라는 것을 안 뒤, 그는 끓어오르는 노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임장수는 그런 빈농의 아들에게 자신의 아들이 밀려나는 것은 가문의 수치라고 생각했다.. (123∼125쪽)매미소리는 우렁차게 들렸다가 끊어졌다가 되풀이됩니다. 힘들어서 쉬는가 싶기도 하고, 어쩌면 저처럼 어디서 매미가 우나 하고 들여다보려는 사람이 있어서 옹크리면서 살피느라 그러는구나 싶기도 합니다.
새벽 나절 잠깐 일어나서 기지개를 켜고 하늘가를 바라보았을 때, 오늘은 구름 한 점 없겠구나 싶었는데, 아침 여덟 시를 넘기고 아홉 시를 넘기니 밝은 햇살이 우리 집으로도 내리쬡니다. 바람도 알맞게 살랑거립니다. 엊저녁처럼 끈적거리지 않습니다. 이만한 볕과 바람이라면, 이불 빨아서 널면 좋으련만, 밀린 이불 빨래는 없으니 조금 아쉽습니다. 그러면 지금 덮고 자는 이불이라도 햇볕에 말려 볼까나.
.. 사실 임지홍은 이미 전통 미술 교육의 포로가 되어 있었던 탓에, 한순간의 노력으로는 지금까지의 습관을 버릴 수가 없었다. 아주 총명해서 모방 실력이 남달리 뛰어난 덕에 선생님들의 사랑과 관심을 한몸에 받았으니, 지홍이 갖고 있는 결점들이 유달리 깊고 많을 수밖에 없었다 .. (137쪽)우리 집에서 십오 미터쯤 떨어져 있는 전철길은 새벽 다섯 시 십 분부터 자정을 넘겨서까지 기차와 전철이 다닙니다. 하루에 두 번쯤, 무거운 짐을 실은 짐기차가 지나가는데, 온 건물이 부르르 떱니다. 이때마다 생각합니다. 저 기차를 모는 분은, 자기가 기차길을 지나갈 때마다, 기차길과 이웃한 집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줄 알까 하고.
우리 집이 깃든 골목 앞에는 차가 거의 안 다니니, 어쩌다 지나가는 차도 아주 싱싱 내달립니다. 마치 내기 달리기라도 하듯. 차는 천천히 달려도 소리가 크지만 빨리 달리면 훨씬 큽니다. 오토바이는 더 시끄럽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동차를 모는 이들은 자기가 달리는 길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기가 탄 차에서 내는 소리’ 때문에 고달픈 줄을 알까요. ‘자기가 탄 차에서 내뿜는 매연’ 때문에 숨이 막히는 줄을 알까요. 자기는 자기 돈 주고 자동차를 샀으니 그만이라고 여길지 모르나, 이 자동차 하나를 만들기까지, 또 자동차가 굴러다니는 동안, 얼마나 많은 환경파괴가 이루어져서 이웃한테 나쁘게 피해를 끼치는 줄 생각할 수 있을까요.
담배꽁초와 빈 담배곽을 길에 버리면서, 침을 퉤퉤 뱉으면서, 껌을 툭 뱉으면서, 과자 껍데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면서, 빈 병과 깡통을 아무 데나 얹어 놓고 지나가면서, 그나마 쓰레기봉투도 아닌 까만 비닐봉투에 쓰레기 담아 남의 집 앞에 내놓으면서, 마음에 조금이나마 꺼려지기라도 하는가요. 돈을 쓰든 찢든 버리든 ‘내 마음’인지요. 매미가 저렇게 울어대고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