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베드카르(1893~1956). 억압받는 달리트를 위해 평생을 바친 운동가이자 정치인. 달리트 해방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인도 독립 후 공화국 헌법 제정 과정에서도 중추적 역할을 했다(자료 사진).
위키피디아 공공자료실
중고등학교 시절 상층카스트 출신 선생님이 두세 명 있었는데 늘 우리더러 "정부의 사위"라고 했어요. 비꼬는 말이었죠. 달리트들을 주류 사회에 편입시키는 정부의 정책들, 예를 들어 달리트들을 위한 법정 유보 정책(공직 임용 등에서 일정 비율을 달리트에게 할당하는 정책)이나 각종 복지, 서비스, 교육 정책들을 비꼬는 것이었어요. "어이, 정부 사위, 와 봐."
평생 잊지 못할 영어 선생님이 두 분 있어요. 한 분은 안슈야벤이라는 여자 영어 선생님인데 상층카스트인 브라민에 속했어요. 방과 후에 제게 따로 영어를 가르쳐 주셨어요. 제게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에요. 자식처럼 대해주시면서 선생님 댁에도 데려가고 저희 집에 오시기도 했지요. 상층카스트와 달리트 사이에 집을 방문한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지요. 제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늘 학급에서 일, 이등을 차지했었거든요.
중고등학교 마지막 시절 영어를 가르치던 상가니라는 남자 선생님도 있었어요. 이 분도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아주 상반된 기억으로요. 이 선생님은 제게 늘 이렇게 말했죠. "넌 무엇 하러 영어 공부하니? 넌 영어 공부 할 필요 없어. 해서도 안 될 일이지." 늘 저를 절망하게 만들었죠. 이 선생님이 보기에 저 같은 달리트들은 결국 비인간적인 천박한 일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거지요. 한번은 제가 되물었어요. "왜 나는 공부를 해선 안 되나요?" 이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어요. "학교 공부를 하고 나면 네가 뭘 할 거냐? 설령 네가 좋은 성적을 받더라도 뭘 할 수 있겠냐? 너는 차마르다. 대학에 갈 수도 없어. 대학에 가서도 안 돼. 누가 너를 대학에 보낼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중고등 과정이 모두 끝난 시기에 제가 전교에서 일등을 차지했어요. 상가니 선생님이 성적을 알고는 제게 그랬죠. "너 성적이 뭔가 잘못된 거 같다. 뭘 한 거냐?"
제가 일등을 한 걸 알고 사람들이 저희 집에 많이 왔어요. 먹을 거랑 스위트랑 들고 와서 축하해주었죠. 근데 우리 집은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었어요. 너무 가난해서 차 한 잔도 대접하지 못했어요. 그래도 마을 사람들 모두 내가 높은 점수로 일등을 했다는 걸 알았어요. 신문에도 났거든요. 정말 기분이 최고였죠. 하지만 얼마 안 가서 깨닫게 되었죠. 그래서 뭐 어쩌겠다는 거지? 나는 더 공부를 할 여건이 안 되잖아. 부모님은 돈도 없으시고. 난 일을 해야 했지요.
학교에서 가장 높은 성적을 받은 학생에게 그동안 마을에서는 251루피를 상금으로 주었지만, 저에게는 학교도 마을도 상금을 주지 않았지요. 난 달리트니까요.
제 삼촌 가운데 한 분이 당시 지방 정부에서 행정 공무원 일을 했어요. 돈이 조금 있으셨죠. 삼촌이 아버지께 저를 도시로 보내서 전기 기술을 배우게 하자고 제안하셨어요. 아버지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셨어요. 제가 공부하는 걸 원하지 않으셨던 게 아니라 빚을 져가면서 공부를 시키고 싶진 않으셨던 거죠. 심지어 형제지간에도 말이에요. 결국 삼촌이 끝까지 밀어붙여서 아버지가 동의하셨어요. 삼촌이 말씀하셨죠. "칸티는 우리 중의 하나에요. 공부를 잘하잖아요. 우리가 용기를 줘야죠. 이게 어쩌면 칸티가 카스트라는 저주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인지도 몰라요."
대학에서도 계속된 카스트 차별의 악령학교는 바브나가르 타운에 있었어요. 나 같은 시골사람은 도시에도 카스트 차별이 있을 거란 걸 처음엔 알지 못해요. 학교에 등록할 때 내 출신지역이나 카스트를 알리게 되지요. 학교 기숙사에 머물면서 대학에서도 상층카스트 출신의 학생들은 늘 그렇듯 우선권을 갖는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그 애들은 자기가 원하는 기숙사 방에서 지낼 수 있었어요. 나와 같은 달리트 출신의 학생들은 모두 따로 분리된 숙소에서 지내야 했지요.
인도에서도 구자라트는 여름을 지내기가 너무 힘들어요. 더위가 극심한 데도 물은 매우 부족한 탓이죠. 대학에는 상층카스트 학생들을 위한 물탱크가 따로 있었는데 우리들에겐 없었죠. 샤워도 할 수 없었고 옷을 세탁할 수도 없었어요. 물이 없으니까요. 마실 물도 충분하지 않았는걸요. 우린 상층카스트 학생들이 사용한 뒤 남은 물을 쓰려고 기다려야 했어요. 걔네들 숙소엔 전기도 들어오고 텔레비전도 있었지만 우리 숙소엔 아무것도 없었어요. 대학도 시골과 다를 게 하나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죠.
난 삼촌이 주신 자전거로 통학을 했어요. 기숙사에서 대학까지 거리가 좀 멀었거든요. 시내에선 곧잘 영화가 상영되곤 했어요. 하루는 다바드라는 상층카스트 출신의 학생이 나에게 이러더군요. "네 자전거 좀 줘. 오늘밤 시내에 가서 영화를 봐야겠어." 나는 싫다고 했죠. 그날 밤 내 자전거는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어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한편 너무 슬프더군요. 내 자전거를 망가뜨린 그 상층카스트 학생에게 불만을 드러낼 수 없었어요. 그냥 가만히 있어야 했죠. 아무 말 없이.
상층카스트 학생들은 아무 달리트 학생이나 골라서 패곤 했어요. 이유 없이 때릴 때가 많았죠. 술에 취해 가지고 와서 심심풀이나 화풀이로 달리트 학생들에게 폭력을 휘둘렀어요. 우리에게 "No"를 말할 권리는 없었지요. 때리면 그냥 맞아야 했어요. 불만을 표시하면 대학 행정부로부터 욕을 얻어먹어야 했으니까요. 복종하는 게 낫죠.
상층카스트 학생들은 우리에게 기숙사로 여자애들을 데려오라고 시키기도 했어요. 우리 숙소에서 여자애들과 시간을 보내겠다고 하면 방을 비워줘야 했지요. 우린 대학의 하인들처럼 일했어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학교를 암렐리라는 지역에 있는 도시로 옮겼어요.
암렐리에서 난 달리트 학생들을 중심으로 모임을 조직하기 시작했어요. 학교에 들어오는 달리트 학생들을 유심히 지켜보았지요.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학생회를 만들었어요. 달리트 청년학생연맹. 우리는 달리트 학생들의 학교 생활, 장학금이나 복지에 관련된 문제에 관한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고소, 고발문이나 수상에게 보내는 청원서를 작성하기 시작했어요. 나도 장학금을 받을 자격이 있었는데 못 받았거든요.
(*칸티의 이야기는 2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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