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와 섬.팔당호수에 떠 있는 섬. 우천리로 짐작된다. 호수 건너 마을은 다산 정약용의 생가가 있는 마현마을이 있다.
강기희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 분원리는 조선 왕실과 궁궐에서 쓰이는 음식 그릇을 굽던 곳이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그릇은 백자. 원래 '사옹원 분원 백자 번조소'이지만 약칭으로 '분원'이라 불렀다. 그러니 '분원리'라는 마을 이름은 왕실과 궁궐에 필요한 음식 관련 업무를 관장하는 '사옹원'의 '백자 분원'이었던 곳이 마을 지명으로 정착된 것이다.
호수변 마을인 분원리는 전체가 백자 가마터지금의 분원리에 오기 전 왕실 가마터는 남종면 금사리에 있었고, 분원리에 자리를 잡은 것은 1752년이다. 이전까지 분원은 땔감과 흙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지역을 찾아 10년 주기로 자리를 옮기곤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가마터는 광주에만 340개소에 이른다고 한다.
광주땅 전체가 분원이었던 것이 현재의 분원리에 정착한 것은 한강으로 땔감과 흙을 운반하기 좋았던 지리적 요건 때문이었다. 백자를 만드는 데 쓰이는 흙은 춘천과 화천 홍천, 양구, 이천 등지에서 뱃길로 이동했다.
1752년 설치된 분원은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고 민영화가 되기 전까지인 1883년까지 130년간 왕실 관요 역할을 했다. 관요를 민간이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된 분원리는 일제의 사기가 들어오면서 1900년대 들어 완전히 문을 닫았다.
왕의 그릇인 '어용지기(御用之器)'가 되었던 분원리 백자는 흰백의 순수함과 절제미가 으뜸이다. 푸른 안료가 더해진 청화백자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이제는 문화재 대접을 받으면서 귀한 것들이 되었지만 100년 전만 해도 일제 사기에 밀려 깨지거나 뒷전으로 밀렸던 것이 조선 백자 그릇이었다.
비운의 역사를 간직한 조선 백자 그릇을 굽던 가마터는 일제가 그 자리에 지금의 분원초등학교를 지으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그랬던 것을 발굴하기 시작한 것은 2001년부터 2002년까지다. 분원리 전체가 가마터로 추정되지만 주변의 민가와 음식점, 학교 등으로 인해 앞으로의 발굴조사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두 차례의 발굴조사 후 경기도는 현장에 '분원백자관'을 만들었다. 주변에 산재한 가마터와 그 역사에 비해 건물 안으로 들어간 백자의 역사는 단촐하다. 발굴 터는 잔디밭으로 변해 그곳이 백자를 굽던 곳인지 짐작조차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