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메르의 그림을 통해 들어가는 17세기 동서교류사로의 여행.
추수밭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베르메르의 그림 안에는 사회적 콘텍스트를 읽어낼 수 있는 코드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그가 태어나고 그림을 그린 네덜란드는 데카르트가 '가능성의 집합소'라 부를 정도로 동서양의 문물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티머시 브룩이 쓴 <베르메르의 모자>(추수밭 펴냄)'는 예술책과 역사책의 장점을 두루 갖췄다. 베르메르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비버 펠트, 중국 도자기, 세계지도, 은화 등이 어떻게 네덜란드 델프트의 거실까지 들어오게 됐는지 설명해주는 역사 책이면서, 책을 읽고 나면 베르메르의 그림을 다시 보게 되는 예술서적이기도 하다.
미술사와 역사의 경계에서 17세기 교역망의 확장 과정을 그림 속에 등장한 소품의 유입경로로 안내해준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 동서양 사람들의 세계화에 대한 서로 다른 시선, 무역 발전의 빛과 그림자, 난파와 대량학살의 비극, 세계 기후 변화의 패턴 등을 통해 17세기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티머시 브룩은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에서 소녀의 얼굴보다 진주 귀고리에, <장교와 웃는 소녀>에서는 집안으로 옮겨진 남녀의 데이트보다 장교가 쓴 화려한 모자에 주목해보길 권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단순한 물건들이 아니라 어쩌면 화가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을 17세기의 역사로 들어가는 문이기 때문이다.
베르메르의 시대는 군대가 시민 사회로, 군주제가 공화제로, 가톨릭이 칼뱅주의로, 상점이 회사로, 제국이 국가로, 전쟁이 교역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58쪽)베르메르가 남긴 유일한 풍경화의 주제는 델프트 남동쪽 항구이다. 이 물길을 따라 내려가면 라인 강에 다다른다. 수문 왼쪽의 빨간 타일 지붕은 동인도회사의 사무실과 창고의 지붕이다. 동인도회사를 통해 동양의 문물이 빠르게 유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