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PD수첩.(자료사진)
MBC
[쟁점③] 오역의 의도성 여부지금껏 거론되지 않았으나 최근 고재열 기자의 '독설닷컴'의 '정지민씨에게 보내는 공개질의' 기사로 인해 수면 위로 등장했기에 이번 기회에 짚어보고자 합니다.
<PD수첩>이 인정하고 사과했던 '오역'은 모두 네 군데입니다. 그런데 정지민씨 말대로 공교롭게도 이 오역들은 모두 아레사 빈슨의 사인을 단정적으로 몰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지요. 그 때문에 <PD수첩>은 '의도성'을 의심받고 있습니다. 내레이션이나 다른 인터뷰들은 모두 '-한다면', '의심'. '-일 수도' 였는데, 그 사이사이 '-걸렸던' 등의 오역을 넣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단정적으로 느낄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의도성'이 있었나 없었나를 가리기 위한 과정은 간단합니다. 초벌 번역과 감수 과정, 그리고 방송에 나간 최종 자막을 비교하면 되지요. 그러나 <PD수첩> PD들은 이 과정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습니다. 바로 '번역자들과의 신뢰' 때문입니다. PD들은 다른 프로그램에까지 영향을 미쳐 제작진과 번역자 사이의 '신의'가 깨지게 될까 우려하고 있는 것이지요.
번역자들은 많지 않은 번역료와 빡빡한 일정, 안정되지 않은 편집실 공간에도 언제나 최선을 다해 번역을 해왔습니다. 그 과정엔 설령 실수로 한두 군데 오역을 했다 해도 제작과정 어딘가에서 걸러질 것이라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만약 자신의 실수 하나가 프로그램의 진위 여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면, 누가 그 부담을 안고 번역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제작진은 그 '믿음'을 위해 '감수'라는 안전장치를 두고 있습니다. 물론 감수 과정에서 오류가 걸러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수를 잘못했다며 나중에 감수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습니다. 제작과정에 개입되는 모든 스태프들의 크고 작은 사고와 실수는 모두 PD가 책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PD수첩> PD들은, 공개적으로 한 번도 번역자들의 초벌번역 문제를 거론한 적이 없습니다. 번역 오류는 <PD수첩> 제작진의 의도하지 않았던 실수였다고 해명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 기자가 '의도성' 여부를 가리기 위해선 번역 원본과 감수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정지민씨가 번역·감수자라는 사실을 생각해냈을 것입니다.
그에 따른 사실관계 확인 차원에서 기자의 질문에 PD가 한 답변은 결코 그 책임을 당신을 포함한 번역자들에게 돌리고자 했던 것은 아닙니다. 또한 번역자들의 번역 실력을 '폄하'하고자 했던 것도 아닙니다. 저 역시 진심으로 이 문제가 누군가의 '책임'이 아니라, '사실관계 확인' 차원으로만 다뤄졌으면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번역·감수자였던 정지민씨의 아래와 같은 '답변'의 진위 여부는 중요한 문제가 되겠지요.
"'PD수첩' 방영분의 모든 오역에 대해 하나하나 내가 하지 않았다고 굳이 말할 필요가 뭐가 있었나? 당연지사니까 하나하나 말을 안 한 것이지. 초벌번역이라고 표현하는 파일들을 봐도 그렇게 내가 번역한 부분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번역/감수한 대로 자막내용을 만들었다면 오역 따위는 있을 수가 없다. 실제로 내가 잘못 번역한 것은 전혀 없으며, 또한 책임질 것도 없으니까, 내게 책임을 씌울까봐 걱정했던 부분은 전혀 없다."(정지민씨 카페 글)그래서 저는 다른 번역자들의 깊은 양해를 구하며, <PD수첩>이 인정했던 번역 오류 중 한 개의 원본 내용을 공개할까 합니다. 영상자료 테이프 12번에 있는 내용입니다.
"기자/@ 로빈 빈슨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른다. 의사들은 아레사가 변형성 크로이츠펠트-야콥 질병 또는 vCJD에 걸렸다고 한다. 이 병은 뇌 질환으로, 스펀지처럼 될 때까지 구멍을 뚫리게 하는 것이다. 광우병의 인간감염 형태이다. CDC에 따르면 이 병으로 세계전역에서 1996년부터 200명 이상이 죽었다고 한다."(번역 원본)문제의 'suspect' 부분입니다. '걸렸을지도 모른다'가 '걸렸다'로 자막 표기돼 오역논란이 생겼고, PD수첩이 번역오류를 인정했던 부분이지요. 이 자료 테이프 12번을 누가 번역했는지 어쩌면 정지민씨도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정지민씨의 번역 실력을 모릅니다. 다른 번역자들보다 번역료를 더 받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잘 모릅니다. 이 문제에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연 PD들이 초벌, 감수된 자막을 의도적으로 단정적으로 고쳤는지 여부를 가리기 위해 중요한 건 역시 '팩트'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한 사람의 번역자였던 정지민씨에게도 깊은 양해를 구합니다.
검찰 수사-원본 제출?"방송제작에 대한 이해 따위 없이 내가 본 취재자료 내용만 알아도, 편집이 의도적으로 중요한 사실들을 누락/왜곡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피디수첩은 자료를 제출하지 않고는 왜곡을 해명할 수 없을 것이다. 현재 갖고 있는 일부 자료 그리고 취재자료에 대한 기억만을 갖고도 아래 주장들을 펼칠 수 있다. 만일 취재자료에 대한 내 기억이 사실과 다르다면, 피디수첩은 필히 방송이 아닌 취재자료로 반증해야 할 것이다. 지금 취재자료를 내놓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나는 기억에 의존해서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인데, 내 기억이 사실과 다르다면 취재자료를 제출해서 반증해야 할 것이다."(정지민씨의 카페 글)나는 당신의 이런 주장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아마 다른 신문·방송 종사자들이 봤더라도 그랬을 것입니다. '기억'에 의존해 말하는 정지민씨의 발언을 반증하기 위해 왜 <PD수첩>이 검찰에 원본자료를 제출해야 하는 걸까요. 자신의 발언 진위만 밝히면 될 뿐, 한국 언론 전체가 막대한 대가를 치러도 좋다고 말하는 걸까요 혹은 <PD수첩>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동료 언론인들과 동종 언론사들에게 장차 족쇄가 될 것임에 분명한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걸까요?
정지민씨가 검찰에 넘긴 취재 원본이 어느 정도인지 저는 모릅니다. 또한, 다른 어떤 번역자가 당신에게 혹은 검찰에 원본 파일을 넘겼는지도 모릅니다. 검찰은 원본을 90% 이상 '복구'하였다며 조만간 '중간수사 발표'를 한다고 하더군요.
검찰에 원본을 제출한 것은 당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한 일이기에 <PD수첩>이 왈가왈부할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려면 조용히 할 일이지 다른 번역자들까지 거론하며 떠들 일은 아니지 않을까 싶군요.
<PD수첩> '광우병' 편엔 당신 이외에도 많은 번역자분들이 도움을 주셨습니다. 영어 번역자만 모두 13분이었지요. 그 분들에게 PD들은 면목없어 하고 있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다른 번역자 분들의 명예가 훼손되거나 상처 입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지민씨 역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