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의 불교코너더위를 피해 낮시간 동안엔 도서관에서 불교서적을 읽는다. 벌써 이 불교 서가를 두달 째 애용하고 있다
우광환
불교서적을 한아름 안고 집까지 들고 와서 끙끙거리며 들여다보고 있는 내게 마침내 아내가 한마디 했다.
"갑자기 웬 불교에요? 일이 좀 안 풀린다고 입산수도라도 준비 하는 거예요?"
'불교' 하면 아내 말처럼 나 역시 평생 고행하는 수도자들만을 상상해왔다. 반대로 장삼과 가사를 잘 차려입고 으리으리한 절에서 생활하는 스님들은 왠지 수도가 부족한 분들이라는 선입견도 있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부처님도 쾌락과 마찬가지로 고행 또한 수도자의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라고 가르쳤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역시 뭘 좀 알아야 면장을 해 먹는다.
인간 부처에 대한 감동부처가 살아생전에 자신이 예배의 대상임을 거부함으로써 제자들을 놀라게 했다지만, 사실 그 말엔 나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상응부경전’에 나오는 바카리라는 비구는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부처에게 예배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듣고 찾아온 부처가 말했다.
“바카리여, 이 늙은 몸을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너는 이렇게 알아야 하느니라. 법을 보는 이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이는 법을 본다고 말이다.”불교에도 교조인 부처에 대한 신앙고백은 있다. 부처의 제자나 신도가 되려는 사람들은 이른바 ‘삼귀의’라는 것을 표명해야 한다.
붓다에게 귀의하나이다.
다르마(法)에 귀의하나이다.
승가(僧伽)에 귀의하나이다.
그러나 그 뜻하는 바는 그가 법을 알고 법을 실천하는 사람이기에, 그 지혜와 인격을 마음으로부터 신뢰한다는 것일 뿐, 그 이외의 의미는 없다. 부처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경전 속에 나오는 그의 열 가지 칭호를 보면 엄청나긴 하다.
응공(應供: 세상의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 정등각자(正等覺者: 샅샅이 깨달은 사람), 명행족(明行足: 지혜와 실천을 겸비한 사람), 선서(善逝: 윤회를 되풀이하지 않을 사람), 세간해(世間解: 세상일을 잘 아는 사람), 무상사(無上士: 가장 높은 사람), 조어장부(調御丈夫: 마음을 잘 조종할 수 있는 사람), 불타(佛陀: 진리를 깨달은 사람), 천인사(天人師: 만인의 스승), 세존(世尊: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
이런 칭호들을 보면 겉으로 보기에 어마어마한 것 같지만, 어디까지나 부처가 위대한 인간임을 찬미한 것이지, 신의 아들이나 신과 인간의 중재자, 또는 속죄자라는 표현은 아니다. 더구나 심판자이거나 신일 수는 더욱 없다.
그렇기에 그는 제자들에게 부처 자신을 믿을 것이 아니라, 너희 안의 불성(누구라도 깨달을 수 있는 본질)을 믿으라고 가르쳤다. 그는 단지 누구보다 먼저 진리로 향한 길을 알았기에 그 길을 가르쳐 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규정했다. 실제로 그는 살아생전 제자들의 스승이긴 했어도 승가의 일원으로 생활했다. 이런 부처를 보고 프랑스의 동양학자인 실반 레비는 불교정신을 일컬어 ‘동양의 휴머니즘’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그러니 중국의 임제선사 같은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미 죽었고, 법당에 모셔져있는 부처님은 부처의 형상일 뿐 참된 부처도 아니며, 아미타불이니 비로나자불이니 관세음보살이니 문수보살 보현보살 등은 모두 이름뿐이며 허상일 따름이다.’ 라고 갈파한다. 그가 제자들에게 했다는 말은 심금을 울린다.
“부처란 것은 환상과 같은 존재인데 비해 너는 어머니가 낳은 실존자(實存者)가 아니냐, 부처라는 허상에 매달리지 말고 자기 자신의 눈을 떠야 할 일이니라.”9세기에 살았던 임제선사와 동시대 인물인 조주선사 역시 이렇게 말했다.
“쇠붙이로 만든 부처는 용광로를 지나지 못하고, 나무로 만든 부처는 불 속을 지나지 못하며, 흙으로 빚은 부처는 물을 지나지 못하지만, 진짜 부처는 각자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앉아있다.”기독교의 경우 구원자인 예수가 신이냐 인간이냐를 따지기 위해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피의 논쟁이 지속되었다. 그런데 구원(깨달음)의 주체가 자신으로 귀속 된다는 이런 가르침은 나 같은 기독교인이 보기에 특별하고 이채로울 수밖에 없다.
불교 용어에 실개성불(悉皆成佛)이라는 말이 있는데, 후세에 생긴 말이라고 한다. 모든 중생이 다 부처가 된다는 뜻이다. 물론 이것은 불교인의 이상이 되어야 하리라. 그러나 재미있게도 부처는 현실주의자였다. 한번은 목가라나 라는 수학자가 부처를 찾아와 ‘당신의 제자들은 모두 목적한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라고 묻자 부처가 솔직하게 말해서 나를 빙그레 웃게 했다.
“벗이여, 내 제자 중에는 거기까지 이르는 이도 있고, 이르지 못하는 이도 있다.”부처는 어디까지나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일 뿐, 나머지는 제자들이 알아서 가야 하는 것이다. 부처는 신이 아니기에 제자들의 길을 전부 데려다 줄 수는 없다. 그런데 아무리 부처님의 제자라고 해도 꾀를 부리거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없으라는 법은 없다. 그것을 부처 스스로가 솔직하게 고백한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