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문제를 다룬 연작소설집 <찔레꽃>을 출간한 소설가 정도상.
홍성식
"선양에서 두만강을 건너온 처녀를 우연히 만난 후, 스스로 금기로 여겼던 유랑의 이야기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남북 민간교류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상황 때문에 쓸 수 없었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다른 작가들은 이 문제에 관심이 많지 않았고,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고 판단했다. 국경을 넘어 중국을 유랑하는 사람들을 '탈북자'로 만들어 한국으로, '기획입국'시키며 영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뻔뻔스럽게도 '북한인권' 운운하는 것을 보며 절망했고 그 때문에 이 작업이 긴급하다고 느꼈다."
1987년 단편 <십오방 이야기>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줄곧 한미문제, 분단문제, 통일문제에 천착해온 소설가 정도상(48)이 이른바 '새터민'으로 불리는 탈북자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룬 연작 소설집을 출간했다.
한 여성이 고향을 떠나 이름을 3번이나 바꾸며 간난신고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눈물겨운 사연을 사실적이고 감수성 어린 문장으로 복원해낸 <찔레꽃>(창비).
현재 정도상은 '겨레말 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상임이사를 맡아 활동하고 있다. 또한 몇 해 전에는 남북작가회담이 성사될 수 있도록 추진한 남한 쪽의 핵심 실무자 중 한 명으로 역할했다.
남북 민간 교류에 오랫동안 몸담아온 사람이 북한에 비판적 태도를 취해야 하는 '탈북자 문제'를 소설로 쓰기는 쉽지 않았을 터. 하지만, 정도상은 단호했다. 당면한 시대의 주요한 문제를 피해가지 않겠다는 작가의식이 그를 자극하고 추동했다.
<찔레꽃>은 충심이란 이름을 가진 북한의 젊은 여성이 '큰돈을 벌게 해 주겠다'는 인신매매꾼의 감언이설에 속아 고향인 함흥을 떠난 후 중국 흑룡강성 빈촌과 선양을 떠돌다 남한으로 들어와 노래방 접대부로 일하게 되는 과정을 추적해간다. 이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자연스레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인 '분단'과 마주하게 된다.
이번 소설집에 대해 정도상은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탈북자의) 숨겨진 비밀을, 그 가슴 아픈 이야기를 집을 잃은 여성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또한 "그런 여성들에게 집을 찾아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권의 실현"이라고 덧붙였다.
물에 젖은 담요 같은 회색빛 하늘 아래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던 24일 오후. 서울 마포에 위치한 '겨레말 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사무실에서 정도상을 만났다. 내친 김에 소설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정체된 남북관계의 향후 전망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아들과의 약속으로 시작된 <찔레꽃>... 탈북자와의 만남이 집필 계기- 탈북자문제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었는가."2003년쯤 일 거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큰아들과 함께 탈북자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꽃제비(탈북한 아동)가 시장바닥에서 버려진 음식을 주워 먹으며 살다가 결국엔 얼어 죽는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이걸 본 아들이 그 이야기를 소설로 써달라고 하며 '얼룩말'이란 제목까지 정해줬다. 아들은 어린 탈북자의 모습에서 아프리카 얼룩말들이 풀을 찾아 이동하다 악어에게 잡아먹히는 장면을 떠올렸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남북 교류 실무자로서 북한을 비판해야 하는 내용이라 쓰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작가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나라도 써야 한다는 생각이 컸고, 결국엔 심양에서 한 탈북자를 만나 가슴 아픈 사연을 직접 듣고는 집필을 시작했다."
- 소설은 한 여성을 통해 남과 북이 동시에 겪고 있는 아픔을 보여준다. 주인공을 여성 탈북자로 설정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똑같은 탈북자라 하더라도 남성에 비해 여성이 훨씬 더 큰 고통을 겪는다. 그들 대부분이 인신매매와 폭행, 강간 등의 끔찍한 경험을 한다. 탈북자문제를 이야기할 때마다 등장하는 단어가 인권이다. 하지만, 탈북자의 입장이 아닌 돈벌이나 정권선전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인권은 위험하다. 나는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숨겨진 추악한 이야기에 주목했다. 그 추악함에 고통 받는 여성을 보여주고 싶었다."
- 소재가 특별한 만큼 취재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신변이 위협받는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취재 비용이 만만찮게 들었다. 단편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선 중국을 2번 가량 오가야 했다. (7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책이 완성되기까지 먼지 날리는 흑룡강성 오지와 영하 40도의 하얼빈과 목단강 등을 10여 차례 방문했다. 그러니, 이 소설은 손이 아니라 발로 쓴 것이다. 아직도 중국 현지에서 탈북자의 입을 통해 들었던 기막힌 사연들이 잊혀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