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권순환씨의 부친이 장례식장에서 잠시 나와 기둥에 몸을 기대고 있다.
박유미
"돈 있었으면 좋은 방 얻어줬을 텐데 하는 마음에 얼마나 서러우시겠어요."권순환씨 부친이 고함을 치며 오열하는 모습을 밑에서 황망히 바라보던 권씨의 작은 어머니는 안타까운 마음이 더해갔다. 타지에 와 일을 하면서 돈을 아껴 고시텔에서 근근이 지내던 조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단양에 사는 형님(권씨의 모친)이 새벽에 비가 너무 많이 와 못 주무시다가 경찰서에서 전화를 받으셨대요. 엄마라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건지." 정씨가 고시텔에 방을 얻은 지는 한 달이 갓 넘었다. 모친이 보낸 37만원을 잘 받아서 고시텔에 낸 게 엊그제인데, 갑자기 사고 소식이 날아왔다.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권씨의 부친은 격양된 목소리로 세상에 대한 원망을 퍼부었다. 기자들을 향해 "너희가 자식 잃은 슬픔을 아느냐"며 울분을 토했다. 돈 많은 집에 태어나 좋은 것 누리지도 못하고 새처럼 훨훨 날아간 자식이 가슴에 박혔다.
같은 병원에 안치된 고 이병철(38)씨는 형들에게도 힘든 내색을 좀체 하지 않던 과묵한 동생이었다. 혼자 사는 게 딱해 형이 선을 보라고 권해도 능력이 될 때까지 장가를 가지 않겠다던 고집 있는 동생이었다. "얼른 자리 잡아서 자기 사업도 벌이고 장가도 가고 싶어했는데…" 이씨의 큰형 이병각(45)씨는 목소리를 가늘게 떨었다.
"3년 전부터 내 친구랑 같이 일을 했는데, 그게 잘 안 돼서 그만두고 서울에서 관리직으로 일하다가 월급도 제대로 못 받았지." 친구와 다시 사업을 시작한 이씨가 용인에 와서 덤프트럭 관리하는 일을 하느라 고시텔에 들어온 지도 2개월째다.
"걔가 신림동에서 고시공부 할 때만 해도 이 정도 방은 아니었는데…."동생 이씨는 9급 공무원에 합격한 적도 있었으나 인생의 굴곡이 만만치 않아 이곳까지 흘러들어왔다. 고시 공부하던 자신을 따라 살다가 동생이 이런 길을 걸은 것 같아서, 자신의 친구 때문에 용인으로 사업을 하러 온 것 같아서, 좋은 방 얻으라고 최대한 도와주지 못한 것 같아서 형은 마음이 더욱 아프다.
분향소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유가족들만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비좁은 거처에 매일 밤 몸을 뉘었을 동생은 마지막 가는 길도 휑한 영안실에서 몸을 뉘었다.
"장남이 돼서 내가 챙겼어야 하는데, 삼촌을 그렇게 따르던 7살 막내에게 당장 뭐라고 말해야 할지…."부슬부슬 내리는 빗 속에서 이씨의 형은 한숨을 깊게 쉬었다. 마지막 통화에서 "그동안 고생했지만 이젠 잘하고 있다"는 동생의 목소리에 기특해하던 것이 생생한데, 월세 37만원의 고시텔에서 숨도 못 쉬고 죽어갔을 동생의 모습은 아득하기만 하다.
"회사 기숙사에 산다고만 했지, 걱정 안 시키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