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달그때 그 꿈은 저 낮달이 되어 떠돌고 있을까
이종찬
지독한 돈가뭄에 허덕이던 1979년 '공단보릿고개'일거리가 사라지면서 임금이 3~4개월씩 밀리게 되자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매달 꼬박꼬박 내야 하는 방세가 밀려 툭 하면 집주인과 실랑이를 해야 하는 것은 물론 쌀까지 바닥을 드러냈다. 이 때문에 현장노동자들은 임금 일부를 미리 받아 써는 '가불'이란 걸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장에서도 노동자들의 안타까운 처지를 알고 있었던지 경리과에 가불 신청을 하면 쉬이 가불을 해주었다. 하지만 가불은 한 달 치 임금의 30% 이상은 할 수가 없었다. 까닭에 노동자들은 4개월 치 밀린 임금을 계산, 한 달 치 임금의 120%까지 가불을 하곤 했다. 그렇게 가불을 하다 보니 간혹 한 달 치 임금이 나와도 받을 게 한 푼도 없었다.
나 또한 그동안 피붙이처럼 아끼며 조금씩 붓던 적금이나 계를 깰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병역특례를 받고 있는 나와 동료들은 행여 공장 문을 닫으면 어쩌나 조바심을 내야 했다. 공장 문을 닫게 되면 병역특례를 받고 있는 나와 동료들은 일주일 안에 곧바로 군에 입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 불리며 국내 생산의 3~40%를 차지한다던 창원공단에 급기야 '공단보릿고개'란 지독한 돈가뭄이 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설마~ 설마~' 하며,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일거리가 몰려올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한번 찾아든 '공단보릿고개'는 좀처럼 떠날 줄 몰랐다.
'공단보릿고개'가 그렇게 나와 동료들의 허기진 허리를 콱콱 졸라매기 시작하자 저마다 살 길 찾기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동료 중 몇몇은 밀린 임금을 담보로 달러빚을 내 공장 주변에 조그만 생맥주집을 내기도 하고, 포장마차를 열기도 했다. 게 중에는 퇴근한 뒤 창원공단 주변 길거리에 쪼그리고 앉아 과일이나 생필품을 파는 동료들도 있었다.
돈이 씨가 말라뿟다 아이가"뭐어? 니가 장사를 한다꼬? 그것도 술집을? 그라다가 회사에서 쫓겨나기라도 하모 우짤라꼬 그라노?""한 달 안에 꼬옥 갚을 끼다. 한 달만 열심히 장사를 하모 그 돈보다 더 큰 돈을 벌 수 있다 안 카나.""요새 니가 월급을 안 갖다 주가꼬 돈이 씨가 말라뿟다 아이가."나는 그때 어머니를 조르고 졸라 돈 50만 원을 타 낸 뒤 내가 다니는 공장 가까이 있는 외동마을에 주막식 카페 '그리메'라는 조그만 술집을 냈다. 그때 돈 50만 원은 꽤 큰돈이었다. 내 한 달 임금이 잔업 철야를 빼고 나면 15만 원이었으니까, 50만 원이란 돈은 세 달 치 임금이 넘는 돈이었다.
'주막식 카페'란 막걸리와 소주를 팔면서도 칵테일까지 파는 곳이었다. 내 나름대로는 참으로 멋진 아이디어였다. 특히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화려한 조명과 값이 비싼 카페를 한번 가 본다는 것은 그림의 떡이었다. 까닭에 나의 포인트는 멋진 카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면서도 술값은 아주 싼 '술집'이었다. 이런 술집은 노동자들의 고급스러움에 대한 갈증을 한꺼번에 해결해주는 것이었다.
게다가 외동마을은 곧 철거를 앞두고 있던 터라 보증금과 집세가 아주 쌌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돈 50만 원으로 보증금 30만 원에 월세 5만 원인 5평 남짓한 그 집을 얻었다. 그리고 고급스럽게 보이는 전등과 화려한 벽지, 칸막이, 여러 가지 액세서리 등을 달아 그야말로 카페 분위기가 나게 했다. 각종 주방기구와 그릇, 막걸리, 소주, 국산 양주 등도 주방에 가득 채웠다
우리는 오늘 주막식 카페 '그리메'로 간다"뭐니뭐니 해도 술집은 홍보로 잘해야 된다카이.""공장 1, 2동은 니가 맡고, 3,4,5동은 내가 맡을게.""이 홍보 전단지를 다른 공장에도 좀 뿌려야 되는 거 아이가.""우선 우리 공장부터 뿌려가꼬 반응부터 한번 살펴보고."나는 그때부터 같은 공장에 다니는 동무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점심시간 때마다 공장 안에 있는 노동자들에게 홍보 전단지를 뿌렸다. '술과 낭만이 그대를 부르는 곳-우리는 오늘 주막식 카페 그리메로 간다'는 제법 그럴싸한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홍보 전단지는 대 성공이었다.
홍보 전단지를 공장에 처음 뿌린 그날 저녁, 가게는 몇 번이나 자리가 가득 찼다. 같은 공장에 다니는 동무 서너 명이 주방과 홀에서 나를 도와주고 있었지만 술과 안주를 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공장의 조장과 반장, 계장, 과장까지 찾아와 내 등을 두드리며 '종종 올 테니까 열심히 해라'는 조언까지 아끼지 않았다.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자리가 없어, 술이 떨어져 못 팔 지경이었다. 하루 수입이 재료값, 집세 빼고 계산해 보니 대략 3만 원은 남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나는 금빛 꿈에 부풀기 시작했다. 이렇게 장사가 잘 된다면 어머니에게 빌린 돈 50만 원은 물론 1년 안에 집도 한 채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주방을 담당하는 여종업원도 한 명 고용했다. '그리메'란 간판이 밤에 잘 보이지 않는다 하여 간판에 멋지게 반짝이는 네온사인도 달았다. 의자가 좀 딱딱하다 하여 의자도 푹신한 걸로 몽땅 바꾸었다. 막걸리와 소주를 몇 박스씩 한꺼번에 주문하고, 칵테일용 싸구려 국산 양주도 몇 가지 더 추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