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는 비를 보며 '끔찍한 노래'를 듣는 밤

[신간] 이민하 시집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등록 2008.07.19 19:00수정 2008.07.1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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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사
만약 아직도 시가 불화와 어두움에 대한 저항일 수 있다면, 그것들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역할 한다면 이민하(41)의 시는 분명 이 공식 혹은, 궤도를 따르고 있다. 그렇기에 참혹하고, 참혹한 동시에 아름답다.

대만과 중국을 거쳐 온 태풍이 한국에 상륙한다는 뉴스가 텔레비전에서 울려대던 밤. 먹장구름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다 이민하 신작 시집 <음악처럼 스캔들처럼>(문학과지성사)을 펼쳐들었다.


낭만적인 제목과는 전혀 다른 서늘하고도 우울한 목소리의 '저자 서문'이 먼저 눈길을 잡아챈다.

우리가 발 디딘 세상을 '병동'으로 봐야하는, 그 병동 안 누구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다는 안타까움이 읽혀 측은함이 밀려온다. 그렇다. 시인은 본질적으로 '슬픈 사람'이다.

"병동을 옮겼을 뿐인데 사람들은 나를 못 알아본다. 복도에서 서성거리는 그들 중 한 사람은 나랑 아주 닮았다. 혀가 마르도록 그녀의 입에서 만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소문처럼 번지면서 벽을 통화할 듯 희미해진다…."

이렇듯 서럽고, 암울한 인식으로 세계를 해석하는 사람이니 이민하의 시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마치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듣는 우울한 단조의 음악 또는, 우리네 삶과 죽음을 냉혹하게 관조하는 끔찍한 노래 같다. 이런 것이다.

우리는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내장과 허공 사이.
저녁과 아침 사이. 지금은 새벽 두 시입니다.


전쟁과 고요 사이를 사용하기 위해
우리는 소리의 약탈에 눈떴습니다.

소년들은 우측으로 소녀들은 좌측으로.
배급표를 받으려면 줄을 서세요.
행렬은 내일과 모레, 아빠의 월급날까지…
- 위의 책 중 '합창단' 일부.


탄생에서 성장 그리고, 멈춰버린 흑백화면의 생을 그려내다

그 탄생부터가 모호한 이들의 결코 빛나지 않는 생을 유령처럼 따라가는 이민하의 '발자국 추적'은 끝나지 않을 ‘내일과 모레’를 지나 아래와 같이 이어진다. 이 노래 역시 행간을 들여다보면 끔찍하기 짝이 없다. 무더운 여름날임에도 서늘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는 기분이다.

그해 경원동 2가에서 3가로 이사를 갔었지. 아마. 학년이 바뀔 적마다 학교가 바뀌었으므로 나는 자주 길을 잃었어. 하교길 파란 대문 앞 흙장난을 하던 낯선 친구들은 오싹한 괴담을 두 귀에 은밀하게 새겨주고 흩어졌지…
- 위의 책 중 '피아노' 일부.

이민하 시인에게 생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알 수 없는 탄생의 비밀을 간직한 채 시시때때로 거처를 옮겨 다니며 괴담에 다를 바 없는 생의 비의(悲意)를 꼼짝없이 견뎌내야 하는 조로한 유년. 이 대목에서 <음악처럼 스캔들처럼>은 화려한 유채색의 시대를 사는 이의 무채색 한탄처럼 느껴진다.

흑백화면에 그려진 탄생과 성장, 그리고 죽음의 참혹한 비밀. 이 시인은 이런 어두운 기조를 끝까지 이어간다. 고통을 통해 고통에 저항하는 순교자의 자세가 이러할까? 이런 걸 보면 시인이란 슬픈 사람인 동시에 '아픈 사람'이기도 할 것 같다. '누드'라는 시의 첫 대목을 보자.

물의 입술에 대고 말을 건다. 내 배꼽까지 샅샅이 만지던 입술. 동그란 배꼽에서 문드러지는 자둣빛 그대의 혀. 아가미 너덜대는 축축한 라디오.

주파수를 잃은 칠월의 계단은 겨드랑이마다 치직거리는 피어싱을 하고 지하에서 바다까지 달렸다….

수록된 시 전편을 통해 끔찍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생의 진실을 독자들의 귀에 읊조리는 이민하.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음악처럼 스캔들처럼>을 "상처와 놀이의 긴장 속에서 씌어졌다"고 정의했고, 그 상처와 긴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시에 오래 머물면서 내밀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한다"는 독법을 조언했다.

웃음 뒤에는 눈물이, 농담의 이면에는 어두움의 그림자가, 희망을 노래하는 입술 속에는 거짓이 숨어 있는 게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품어본 사람들에게 어울릴법한 책이다.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이민하 지음,
문학과지성사, 2008


#이민하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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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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