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 너머 아련한 산울림

[책갈피] 김남조, 수필 '그 수평선을' 중에서

등록 2008.07.23 11:56수정 2008.07.23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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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하늘은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 같은 것일까? 산울림 같은 것일까? 육지에는 하늘의 모습이 비치지 않는데 물 위에 언제나 선명히 피어 오르는 하늘의 그림자가 있다. 작은 호수거나 허리띠처럼 가늘고 긴 실개천이나 심지어는 두메의 우물 속에도 하늘은 고요히 내려 잠기어 그림자를 지운다. - 김남조, 수필 '그 수평선을' 중에서

 

시인의 언어는 고도로 정제된 언어다. 그중에서도 여류 시인의 언어는 촘촘한 채로 걸러낸 고운 모래알처럼 섬세하기 이를 데 없다. 그 섬세한 모래알들이 서걱대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 어느새 눈앞에 투명한 바다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 바닷속에 신기루처럼 일렁이는 푸른 하늘.

 

김남조 시인은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을 바라보며 "바다와 하늘은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 같은 것일까? 산울림 같은 것일까?…"라고 노래했다. 특히 "산울림"이란 표현은 시인의 감수성이 아니면 포착할 수 없는 절묘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구절은 연암 박지원의 <녹천관집(綠天館集)> 서문에 나오는 한 대목을 떠올리게 한다.

 

고인을 모방해서 글을 쓰기를, 마치 거울에 물건이 비치듯이 하면 같다고 할 만할까? 실체와는 좌우가 상반되니 어떻게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마치 물건이 물에 비치듯이 하면 같다고 할 만할까? 아래위가 거꾸로 나타나니 어떻게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마치 그림자가 실체를 따르듯이 하면 같다고 할 만할까? 한낮에는 난쟁이·땅딸보가 되었다가 해가 기울 무렵에는 키다리ㆍ꺽다리가 되니 어떻게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 박지원, '<녹천관집(綠天館集)> 서문' 중에서

 

두 인용문에서 거울과 그림자가 공통적인 소재로 등장하지만 연암 박지원이 실학적·과학적 시각으로 접근하는 데 비해 김남조 시인은 문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뭇 대조적이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풍경을 실증적으로 접근하면 하늘은 하늘이고 바다는 바다일 뿐이지만 거기에 시적 감수성을 이입하면 하늘과 바다는 서로가 서로를 목놓아 부르는 산울림이 된다. 어쩌면 시인은 아득히 보이는 수평선 너머에서 아련히 들려오는 산울림을 연상했는지도 모르겠다.

 

세속의 불협화음과 홍진(紅塵)을 기독교적 영성(靈性)으로 걸러내 정갈한 언어로 갈앉혀내는 구도자적 시인 김남조. 그녀의 시엔 '아득히 보이는 수평선 너머에서 아련히 들려오는 산울림'처럼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떨림(울림)이 있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시는 오랫동안 입에 머금고 음미하지 않으면 그 맛을 알 수 없다. 한두 모금만 마셔도 온몸이 전율하는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독자라면 그녀의 시가 무색무취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이미 국민적 애송시로 자리잡은 '겨울바다'만 보더라도 비교적 무난한 첫인상과 달리 그 깊은 의미는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마치 가도 가도 손에 잡히지 않는 수평선처럼.

 

"기도를 끝낸 다음 /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 그런 영혼"만이 길어올릴 수 있는 "인고(忍苦)의 물기둥"(겨울바다), 칼릴 지브란과 니체의 음성을 중첩해 놓은 듯한 울림, 기도와 인고를 수반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세계. 맑고 투명한 영혼의 울림을 전해주는 그녀의 시는 늘 한결같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겨울바다와 마주선 막막함, 아득한 수평선을 향해 달려가는 공허함 같은 것으로 채워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한순간도 삶을 포기할 수 없다.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영혼으로 수평선 너머 미지의 세계를 갈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이기에.

2008.07.23 11:56ⓒ 2008 OhmyNews

수평선 그 너머에는

김옥기 지음,
소소리, 2014


#김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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