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단고기 장밥과 좁쌀밥.
오마이뉴스 남소연
'아침 진지 드셨어요?'라는 인사를 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나요?
국민소득이 100불에도 못 미치고 먹고 사는 게 삶의 전부였던 시절.
명절이나 어른 생신날은 아이들에게는 배터지게 먹을 수 있는 날, 세뱃돈 받을 수 있는 날이었다. 그래서 집안 어른 되는 집은 어려운 중에도 고기는 먹여야 되겠는데 가장 구하기 쉬운 것은 마당에서 키우던 닭이니, 몇 마리 잡으면 온 가족이 달라붙어 닭 선지부터 벼슬까지 버릴 것 하나 없이 온갖 것을 음식재료로 써서 음식을 만들었다.
먹고 산다는 것이 빤한 시절이니, 이럴 때 큰집 도와준다는 핑계로 식구들을 다 끌고 가 배터지게 먹었지만 하나도 흉이 될 수 없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그런 날은 푸성귀만 먹던 우리들에게 단백질을 공급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병치레 어머니 "개장국이 먹고 싶구나"'열아홉살 섬색시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총각선생님'은 가르쳐야 할 아이들이 횟배와 영양실조와 결핵에 시달려 공부보다는 단백질 공급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아이들과 허구헌 날 들로 산으로 뛰어 다니며 뱀을 잡아먹으며 아이들 체력을 키웠다.
아니 쉽게 얘기하자. 이 땅에 라면이 등장한 것은 1963년의 삼양라면이 최초였다. 아직도 보릿고개가 있었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라면을 '기근을 면해줄 식품'으로 극찬했다는 일화가 있는 것을 보면 굶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겠다.
농경문화에서 소가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나 크다. 늙어죽지 않는 한 고기를 먹기 위해 소를 잡는다는 것은 망조 든 집안의 대들보를 빼는 일과 같았을 것이다. '애완동물'이란 것은 마당에 놓고 기르던 닭이나 개새끼가 아니라 황소에게 더 걸맞은 말일지도 모른다.
'우골탑'이 무엇인가? 이렇게 배곯고 사는 것이 못 배운 탓이라며 늙어 죽을 때까지 나를 돌봐줄 장남을 위해 대들보 같고 한 식구 같은 소를 팔아 대학등록금 마련해 주어 생겨난 말 아니던가? 식구들은 못 먹어도 군불 때서 소죽 끓이고 새벽부터 나가 밭 갈고 냇가에서 씻어주고 내 새끼처럼 등 긁어 주던 소 아닌가? 주인과 떨어지기 싫어 눈물을 그렁이는 소를 팔고 매몰차게 돌아서며 논둑을 걸어오는 농부의 심정은 어떠했을 것인가?
95세로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는 50대에 병치레 하면서 잡숫고 싶은 음식을 말씀하시라 했더니 "나 개장국이 먹고 싶다"고 하셨다. 처음에는 집에서도, 집안 식구들 중에서도 그런 음식을 먹은 적이 없어서 놀랐다. 그리고 당황했다. 어떻게 여자가 그런 음식을 들 수 있는가 하고.
그러나 그만한 연배의 여자들도 '그냥' 접할 수 있는 음식이겠구나 라고 이해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 후였다. 사실 그 때만 해도 '개장국'이라는 단어는 예쁜 입에서 항문을 '똥구멍'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에게는 충격적이었다. 방송에서 국악이 흘러나오면 "무슨 기생음악이냐"고 슬며시 다이얼을 돌리는, 구습을 타파하자는 '신식교육' 영향도 컸으리라 생각한다.
푸아그라와 샥스핀, 개장국의 차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