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의 바다7월 5일 촛불집회에서 거리를 메운 촛불의 물결
양희석
그간 촛불항쟁을 서구의 68혁명(혹은 운동)과 비교해 그 유사성에 주목하는 글들이 간혹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사건을 알려진 역사적 사례에 비추어 이해하려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다. 물론 68운동은 역사적 배경에서 지금 우리와 크게 다른데다, 나라마다 특유의 발전과정을 보이기 때문에 곧바로 비교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아마도 상당히 정교하고 복합적인 역사적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기왕에 유사성 여부가 거론되는 마당이니, 촛불항쟁의 새로움을 약간 넓은 시야에서 명확히한다는 제한된 취지에서 한번 비교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싶다.
서구의 68운동에는 촛불항쟁에 자연스레 오버랩되는 면모들이 많이 있다. 당시까지 자율적 주체로 인정받지 못했던 젊은 세대의 자발적 주도,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 축제와 저항의 결합, 생활정치의 발견, 활발한 토론문화, 참여민주주의의 극적 진전, 대학 교육체제 비판, 다양한 문화적 발산 등이 그것이다. 심지어 미국 언론보다 더 친미적인 슈프링거 같은 보수 언론제국에 맞선 수차례 대규모 시위와 언론사 공격은 우리 현실의 닮은꼴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분명 68운동은 거리의 정치를 통해 그때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방식의 삶을 실험하고자 했고 당대로선 무척 창의적이고 기발한 상상력을 동원하기도 했다.
68운동의 새로움과 딜레마그러나 그 운동은 당대의 정치적 맥락에서 급진적인 해방을 목표로 한 저항운동이었다. 우선 그것은 혁명에 대한 과거의 기억에 압도당한 면이 있었고, 이 때문에 자신들이 추구한 새로운 대안적 가치와의 충돌을 계속 경험했다. 파리의 5월사태만 보더라도 저항방식은 오랜 혁명전통에 따른 것으로, 거기엔 프랑스대혁명에서부터 1871년 파리코뮌의 바리케이드 그리고 1917년 러시아혁명에 대한 기억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비장한 과거의 추억과 미래의 상상력 간 긴장이 계속된 것이다. 게다가 그 운동목표는 새로운 사회변혁이 일국적 차원에서 가능하리라는 막연한 환상에 근거한 것이기에 내내 모종의 딜레마에 처해 있었다.
그 결과 68운동의 저항은 점차 폭력이냐 비폭력이냐의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68운동의 역사학자 길혀홀타이(I. Gilcher-Holtey)는 급진성과 폭력성에서 비롯된 갈등이 운동의 붕괴에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이는 운동가들 내에 좌절감이 확산되는 데도 크게 일조했다. 프랑스 68혁명의 절정이었던 5월이 지나고 치러진 6월의 선거는 오히려 드골주의자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결국 폭력/비폭력 여부가 운동세력 내에 갈등지점으로 잠복해 있었고, 운동은 끝내 분열, 과격화와 고립화의 덫에 걸렸다. 그 좌절로 인해 일부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우리는 승리하지 못했다. 천만다행이다" 같은 냉소가 퍼지기도 했다.
세계 도처에서 발생한 68운동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흔히 세계사를 크게 바꾼 혁명으로 인식된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구좌파 모두를 겨냥했던 이 운동은 한편으로 체제 내에 포섭되어 길들여지기도 하고, 다른 한편 체제 전반에 스며들어 의미있는 사회변화, 더 나아가 세계체제의 변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 운동에서 나온 새로운 감수성은 새로운 사회운동들을 낳고 참여민주주의를 한 단계 비약시킨 것이 사실이다.
촛불항쟁, 시장만능주의에 맞선 민주주의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촛불항쟁과의 결정적 차이를 말하는 것이 좀 싱거워진 셈이다. 우선 촛불항쟁의 이념적 토대가 68운동과 전혀 다르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국민 건강권과 검역주권 요구는 곧 다수 '국민'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이기에, 전혀 급진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68운동은 급진적이고 변혁적인 운동으로, 촛불항쟁은 온건한 민주주의 또는 혹자의 주장대로 '대한민국 민족주의' 운동으로 대비시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