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붉은 군대'는 해방군? 학살자?

[해외리포트] 옛 소련 범죄 다룬 라트비아 다큐멘터리 <소비에트 스토리> 논란

등록 2008.07.16 09:42수정 2008.07.16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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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비에트 스토리> 포스터.
<소비에트 스토리> 포스터.sovietstory.com

독도 영유권, 동해 표기, 과거사 문제. 한국과 일본을 여전히 괴롭히고 있는 문제들이다. 과거와 관련된 분쟁거리가 전혀 없는 국가가 있을까마는, 나라마다 그 정도는 엄청나게 다르다. 그러한 분쟁의 산물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청산되거나 정리되는 경우도 있지만, 무시되거나 잊히는 일도 종종 있다. 이러한 역사 문제는 현재를 사는 이들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에도 영향력을 발휘한다.

기자가 발트 3국의 <오마이뉴스> 통신원 일을 한 지도 5년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발트 3국에 관한 여러 기사를 썼지만, 그중에서도 꾸준히 기자의 관심을 끈 사안들은 역사 청산에 관한 문제였다.

발트 3국에서는 특히 2차 세계대전에 대한 평가 및 소련 붕괴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동화되지 않은 채 살고 있는 '이방인'들 문제가 그러한 역사 관련 현안이었다. 그 문제들은 잊을 만 하면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와 기자를 끌어당겼다.

작년 4월 말 러시아의 심기를 건드리며 청동군인동상을 철거한 후 많은 경제적 손실을 입었던 에스토니아의 올해 상반기 경제성장률은 0.4%에 그쳤다.

그것이 러시아의 경제적 보복에 의한 것인가 하는 논란도 있다. 물론 명확한 물증이 제시된 것은 아니지만, 여러 상황을 볼 때 그러한 심증을 무시할 수는 없는 형국이다. 이는 발트 3국 같은 작은 나라의 국민들에게 강대국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똑똑히 알려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옛 소련의 역사적 정통성에 정면 도전한 작은 나라 라트비아의 다큐멘터리

그런 와중에, 올해 라트비아에서도 작년 에스토니아의 청동군인동상 철거처럼 러시아의 속을 대놓고 긁는 일이 일어났다. 지난 5월, 1930년부터 라트비아가 독립할 때까지 벌어졌던 옛 소련의 학정과 학살, 숙청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극장에서 상영된 것.


<소비에트 스토리(감독 에드빈스 슈노레)>라는 이 다큐멘터리는 그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거나, 얼핏 알려지긴 했지만 전모가 전해지지는 않았던 사안들을 역사적 기록과 연구, 살아있는 증언을 통해 대담하게 재구성해 관객에게 쏟아냈다. 감독이 영화를 통해 제시한 옛 소련의 범죄 관련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932년 겨울, 소련 정부 정책에 협조하지 않던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보복하기 위해 모든 물자 공급을 중단하고 현지의 음식도 몰수해 그 해 겨울 동안에만 자그마치 700만 명의 우크라이나인들을 아사시킨 사건.
▲ '아우슈비츠의 해방군'으로 자처하는 러시아인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러시아 내부로 도망쳐온 유대인들을 자진해서 나치 독일에 넘겨준 사실.
▲ 나치 독일을 빼닮았던 소련의 일부 정책 및 그것을 답습하고 있는 오늘날 러시아의 정치인들과 젊은이들.
▲ 발트 지역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시베리아 강제 유형 및 생체실험 등.


잘 알려지지 않았던 옛 소련의 반인륜 범죄 관련 내용을 이 영화는 정면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 때문일까. 자주 등장하는 끔찍한 영상을 끝내 보지 못하고 눈을 돌려야 하기도 했다.

옛 소련의 역사적 정통성에 정면으로 도전한 이 영화가 '폭풍'을 불러올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 <소비에트 스토리> 개봉을 반대하는 러시아인들은 5월 17일 모스크바에 있는 라트비아 대사관 앞에 모여 감독의 인형을 불태웠다. 러시아 언론과 정치인들은 이 영화가 사실에 전혀 근거하고 있지 않거나, 알려진 사실도 왜곡하고 있다며 공개적으로 반감을 표현했다.

러시아 언론이 펴는 반론의 핵심은 전혀 다른 곳에서 일어난 일을 영화에서 억지로 편집해 뒤섞어놨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러시아 언론은 우크라이나 대기근 사건에 사용된 영상 중 상당수가 그와 상관없는 다른 자료들이라며 감독을 비난했다.

 영화에 삽입된 우크라이나 대기근 사건 사진. 러시아에서는 영화에 사용된 자료들이 그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영화에 삽입된 우크라이나 대기근 사건 사진. 러시아에서는 영화에 사용된 자료들이 그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sovietstory.com


러시아 쪽 "역사 왜곡" - 서유럽 "진실 전달"

그렇지만 러시아 이외 국가의 반응은 달랐다. 영국의 <더 이코노미스트>는 6월 3일자 기사에서 "<소비에트 스토리>는 과거 청산을 위한 가장 강력한 해결 방안이다. 이 영화는 아주 흥미롭고 대담하다"고 전했다. 영화 제작을 아낌없이 후원했고 최초로 상영됐던 유럽의회에서도 이 영화가 진실을 전하고 있다며 찬사를 보냈다.

러시아인이 인구의 거의 절반에 육박하는 라트비아 내부 분위기는 어떨까? 라트비아 내 러시아인들은 예상과 달리 차분했다. 상영 반대 시위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고, 감독에 대한 어떤 물리적 보복이나 폭력도 없었다.

라트비아 내 러시아인의 권익 증진을 위한 모임의 대표 격인 '슈탑'의 대표 드미트리 카테미로프씨는 영화에 대한 슈탑의 공식 견해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슈탑에는 이 영화에 대해 (외부에 표출할) 공식 견해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면, 이 영화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사회에서 우위를 유지하고자 하는 극우민족주의자들이 사회 분열을 이용해 목표를 달성하려는 수단으로밖에 보이지 않으며 따라서 논란의 가치조차 없다. 인종주의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은 이미 신뢰를 완전히 상실했다. 다행히도 그들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수는 극히 적다."

카테미로프씨는 영화 내용 중 상당 부분이 왜곡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주장했다. 옛 소련 시절, 라트비아는 소련 내 여러 공화국 중에서 희생자가 가장 적었으며 라트비아 사람들이 독일 편에 서서 유대인 학살을 방조한 증거까지 나오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소비에트 스토리> 같은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카테미로프씨는 설령 <소비에트 스토리>의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고 해도 현재의 러시아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소련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러시아는 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저질렀던 잘못을 이미 모두 갚았다고 주장했다.

"러시아보다는 차라리 (스탈린의 고향인) 그루지아가 스탈린의 잘못을 사죄하는 쪽이 더 나을 것이다. 스탈린은 고향 그루지아에서 진정한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 그루지아에서는 심지어 국가적 영웅에게 '또다른 스탈린'이라는 상까지 수여하고 있다. 그런데도 라트비아는 그루지아를 '민주국가'라고 부르며 중요한 우방으로 생각하고 있다."

 러시아는 유럽 전체를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시켰다고 밝히고 있지만, 스탈린과 히틀러의 통치 방식엔 공통점이 많았다. 왼쪽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쪽 포스터, 오른쪽은 소련 쪽 포스터.
러시아는 유럽 전체를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시켰다고 밝히고 있지만, 스탈린과 히틀러의 통치 방식엔 공통점이 많았다. 왼쪽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쪽 포스터, 오른쪽은 소련 쪽 포스터.sovietstory.com


감독 "러시아, 유리한 것만 기념하고 불리한 내용 감추고 있다"

이러한 반론에 대해 슈노레 감독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 기자와 만난 슈노레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러시아가 그러한 소련의 후예가 아니라고 하지만, 러시아는 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의 붉은 군대가 나치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성대한 행사까지 열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자랑스럽고 가치 있는 역사적 사실은 성대하게 기리지만, 불리하고 손해가 될 만한 사실은 감추거나 다른 나라를 탓하려고만 할 뿐이다."

대학에서 정치학과 국제관계학을 전공한 슈노레 감독은 본래 다큐멘터리 제작과는 거리가 멀었다. 공부하는 과정에서 소련 범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슈노레 감독은 2년여 동안 유럽 각지의 문서보관소와 도서관 등을 오가면서 정보를 모았고 그것을 토대로 <소비에트 스토리>를 만들었다.

슈노레 감독은 많은 나라들이 옛 소련의 범죄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러시아의 힘과 엄청난 지하자원 때문에 이를 드러내놓고 이야기하기를 꺼린다고 우려했다. 또한 현재 러시아에서 불고 있는 극우주의 바람이 과거 나치와 거의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2005년 5월 9일 붉은 광장에서 열린 2차 세계대전 전승 기념 행사.
2005년 5월 9일 붉은 광장에서 열린 2차 세계대전 전승 기념 행사.sovietstory.com

 200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승전기념일 행사에 참가한 각국 정상.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도 보인다.
200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승전기념일 행사에 참가한 각국 정상.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도 보인다.sovietstory.com


위험 감수하고 출연한 러시아 학자들, 자국인 범죄도 고발한 감독

영화가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러시아 언론들의 주장에 대해 슈노레 감독은 "영화에 사용된 정보들은 대부분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며 "의혹이 제기된 자료들 중엔 출처나 발생 시기 관련 기록이 불분명한 것도 있지만, 영화 제작을 도와준 역사학자들이 당시 사건과 관련된 기록임을 확인해줬다"고 반박했다.

실제로 이 영화는 기록 영상과 사진 뿐만 아니라(고르바초프가 스탈린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하는 장면도 나온다) 유럽과 러시아의 많은 역사학자들의 연구와 증언을 바탕으로 했다. 예를 들면 유럽에서 역사 연구의 장인으로 손꼽히는 노먼 데이비스는 직접 영화에 출연해 소련의 역사를 증언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여러모로 위험한 상황인데도 영화에 출연한 러시아 학자들은 매우 인상적이다. 체첸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에 관한 기사를 쓰다가 의문사한 안나 폴릿콥스카야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러시아의 지식인이나 언론인들은 국가 정통성이나 정책에 정면 도전할 경우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

 에드빈스 슈노레 감독.
에드빈스 슈노레 감독.슈노레 감독 제공

또한 슈노레 감독은 민족 간의 갈등을 부추기려는 의도로 영화를 만든 것 아니냐는 일각의 비판 역시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 영화가 러시아인들의 잘못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아니다. 슈노레 감독은 영화에서 옛 소련 시절 라트비아 정치인들의 숙청 및 학살에 관여한 라트비아인도 고발했다. 소련 붕괴 후 모스크바로 거처를 옮긴 그 라트비아인은 그 곳에서 영웅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다.

마지막으로 슈노레 감독은 지금으로서는 차기작 계획이 없지만, 혹시라도 다시 메가폰을 잡게 된다면 역시 역사 관련 이야기를 할 생각이라고 전했다.

2차 세계대전의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고 있는 발트 3국. 어두운 과거를 다시 끄집어낸 다큐멘터리 <소비에트 스토리>가 과거의 아픔을 진정으로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지 지켜볼 일이다.
#에드빈스 슈노레 #과거 청산 #소비에트 스토리 #전쟁 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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