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한국의 문화는 한국을 사랑하는 이들로 인해 계속 전해지고 있다.
문종성
자신의 삶 그 자체가 한인 이민 역사로 설명되는 마르따 할머니와의 이야기. 대화 내내 옛날 옛적 전설을 듣는 것처럼 어찌나 신기함으로 도배됐던지 이야기의 동선을 따라오던 해도 제 분수를 잊어버리고 서쪽 하늘에 붉게 물들어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때까지도 옆에서 계속 전화모뎀을 통해 인터넷에 접속시도를 하시던 선교사님.
"이거 도저히 안 되겠는데요. 도무지 연결이 되지가 않네.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
마지막 실낱같은 희망마저 끊기는 건 아닌지 우울함이 밀려오는 순간이었다. 난 인터넷 쓰는 걸 거의 체념한 채 마르따 할머니와의 이야기를 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어디 정 많은 한국사람 아니랄까봐 고국에서 온 청년들을 속절없이 그냥 보내겠는가.
"저녁 차릴테니 들고 가."
평소 같았으면 일단 괜찮다고 정중히 거절모션을 취했겠지만 어쩐지 저녁이 목적만은 아닌 것 같아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녀로선 언제 또 쿠바의 이 작은 도시에서 한국인을 만나게 될지 기약도 없을 터. 손자 같은 아이들 더는 해줄 건 없지만 그저 따뜻한 한 끼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 마음, 꼭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의 잔상을 보는 것 같다.
어둠속에 사그라지던 촛불, 다시 빛을 내기 시작하고"드디어 방법을 찾았어요!"
마르따 할머니 가족과의 식사를 마치고 밤중에 선교사님을 다시 찾으니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 섬광처럼 스치는 예지란 바로 제3기관과 제3자를 통한, 말 갖다 붙이자면 '더블 서포트 시스템' 이메일 전송.
방법인 즉 이렇다. 어차피 선교사님과 마르따 할머니 댁에서 인터넷 사용은 이미 물 건너 간 상태다. 그리고 에텍사도 역시 사용불가. 호텔 역시 사용가능 불분명에 이미 시간도 늦었거니와 가격도 비싸 고려 대상 제외. 그런데 단 한 곳이 남아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바로 신학교 컴퓨터실에 해외에 이메일 정도는 전송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설치된 것이다. 일단 장소는 결정됐다. 어둠 속에 사그라지던 촛불이 다시 제 빛을 내기 시작했다.
두 번째, 이제 제3자를 확보해야했다. 제3자란, 그 신학교에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요구하는 요금을 내고 컴퓨터 사용증명을 인증한 사람에 한해서만 일정 시간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있었는데 외부인인 내가 컴퓨터를 쓰게 된다면 명백한 불법행위가 되어 내가 들어가도록 방치한 사람들이 처벌을 받게 된다.
물론 이방인이 함부로 컴퓨터를 손댈 만한 어떤 조항도 없고, 허락도 되지 않는다. 더욱이 선교사님 역시 집에 컴퓨터가 있기에 굳이 학교에 따로 신청하지 않으셨단다. 그래서 물밑 작업으로 연줄을 확보하는 게 급선무였다.
다행히도 컴퓨터실 맞은 편 숙소에서 밤 늦게까지 춤을 추고 있던 한 여학생에게 사정을 설명해 다음 날 메일을 보낼 수 있는 환경을 어렵사리 구축해 놓았다. 거짓말처럼 모든 상황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이다.
이제 남은 건 부디 학교 컴퓨터가 버벅대지 않고 무사히 메일만 전송하면 되는 것뿐. 가끔 메일이 수신되지 않거나 파일을 첨부해서 전송완료 글씨가 떴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게 전혀 파일이 전송되지 않은 경우가 흔하디 흔하다는 것이 불안한 걸림돌이었다(이것은 후에 쿠바 아바나에서 현대 직원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난 20MB 되는 파일을 4개로 다시 분리했다. 그리고 선교사님 USB에 파일을 저장시켜 넘겨주었다. 내가 컴퓨터 실에 출입하지 못하니 대신 처리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 때서야 막혔던 숨을 한꺼번에 풀어 뱉을 수 있었다. 불가능할 것만 같던 일을 쉬이 포기하지 않고 해답 찾기에 골몰했더니 역시 못할 건 없었다. 또 한 번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에 이 밤 아주 푸근한 잠을 청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