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노즐경유의 노즐이다. 노즐의 레버를 당겨 주유를 하게 된다.
김학현
나는 늘, 한가함과 분주함 사이, 나와 너 사이, 그리스도인과 주유원 사이, 과거와 현재 사이를 오가며 하루하루를 연장해 갔다. 웃고 울고, 즐겁고 어둡고, 속 시원하고 속상하고 등을 반복하며 목사 주유원으로서 그리 인생을 써가고 있었다. 그날은 몇 명의 손님들 때문에 기분이 고왔다. 살맛이 났다. 살맛은 남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어야 하는데, 그게 아직 모자란 사람이라 안 되었다. 환경과 사람에 따라 웃음바다와 슬픔의 골짜기를 오가는 내 속내가 너무 싫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그때 내가 읽는 책도 여지없이 이 진리를 뱉어놓았다. 나도 강단에서 무지기수로 우려먹던 말이다. 그게 성경의 진리다. 근데 나는 어땠던가. 나드는 손님이 뱉은 말 한 마디에 어눌해지고, 그 한 마디에 오금을 못 펴기도 하며, 반대로 하늘을 나는 때도 있으니, 이래 가지고야 환경이나 상대의 지배에서 놓일 수 있을까. 그들이 점령하게 하지 말고 그들을 점령하자 각오하지만 내 맘은 늘 그 반대로 갔다. 그런 내가 나도 미웠다.
얼떨결에 담뱃값 받은 목사심란함의 첨단을 헤매고 있을 때, 검은색 레저용 차량 한 대가 들어와 나의 끝 간 데 모르는 어수선한 심상에 마침표를 찍었다. 다른 때보다 더 잽싸게 달려 나가 외쳤다. 그런 행동으로 모든 것을 잊겠다는 각오를 하듯.
"어서 오세요. 얼마나 넣어드릴까요?""가득 채워주세요."조금은 풍성한 몸매의 여인이 창문을 열며 말한다.
"오늘 세차 할 수 있죠?""그럼요."기름을 넣은 후 계산을 동료에게 맡기고 나는 먼저 세차장으로 가서 대기했다. 그때는 같이 일하는 동료가 넘어져 다쳐 한쪽 팔에 깁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차는 내가 도맡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주유소 졸자라 내가 했지만….
내가 알바 한 지 2개월 남짓에 몇 번이나 주유원들이 바뀌었다. 이게 바로 내가 일하던 주유소라는 일터의 특징 중 하나다. 쉽게 들어오고 쉽게 나가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박봉에다가 특별한 계약도 없이 들어와 힘들면 나가는 이들이 많다 보니 그랬다.
내가 일하고자 찾아갔을 때 나를 처음 선봤던 선배도 내가 일을 시작하고 얼마 안 돼 그만뒀고, 후임으로 온 후배도 한 달을 채우고는 그만뒀다. 그때는 숙식을 주유소에서 하는 후배 한 명이 다시 왔지만 주로 세차를 하는 낮 동안은 근무 시간이 아니라 내가 세차를 할 수밖에 없었다.
계산을 마친 차가 세차장으로 들어왔다. 우리 세차기가 좀 낡아 차 앞 범퍼가 잘 닦이질 않았다. 앞 범퍼를 봉걸레로 닦고 세차할 수 있도록 손짓과 입짓으로 안내해 차를 세웠다. 세차기를 작동시키고 세차기에서 공기가 나오는 동안 뒷부분부터 물기를 닦았다. 이런 차종이 그렇듯 앞 유리를 닦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손이 닿지 않기 때문이다.
운전자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청하여 옆문을 잡고 매달려 앞 유리의 위쪽도 닦아 주었다. 대개는 대강 닿는 부분만 닦는데 그날은 바쁘지 않아 그렇게 했다. 세차를 마친 후 세차비를 달라고 손짓을 하니 운전자는 차창을 아래로 내리고 세차 할인권과 꼬깃꼬깃한 돈을 내밀며 이렇게 말하며, 차를 잽싸게 뽑아 사라졌다.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수고 많으셨어요. 나머지는 담뱃값 하세요."아니다 싶어 차를 멈추려고 손짓을 해보았지만 차는 벌써 저만치 달려가고 있었다. 결국 팁을 받은 것이다. 목사가, 그것도 담뱃값을. 독자들도 이미 눈치 챈 분이 있겠지만 목사인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돌돌 말린 돈을 펴보니 4천원이었다. 지프 형이니 세차비는 2천 원이다. 2천원은 담뱃값인 것이다. 담배 한 갑에 얼마인지 모르지만 2천원을 담뱃값으로 받고 보니 마음이 그랬다.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마음, 바로 그런 마음이었다.
그녀가 전해 준 따듯한 마음이 억세게 고마웠다. 단돈 2천원에도 이렇게 마음이 실리다니. 그러나 담뱃값을 받은 내 마음이 영 개운치가 않았다. 그의 고운 마음이 담긴 말에 순종하여 생전 처음 '담배 한 갑을 사 볼까?' 피우진 못하겠지만, '기념으로 책상 위에 놓아둘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결국은 동료들과 하드 한 개씩을 나누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