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그림주인공 '이시'를 그린 모습. 누가 그렸는지 알 수 없으나, 이 책이 나온 흐름으로 보아서, 일본사람이 일본책을 낼 때 넣은 그림이 아니랴 싶습니다만, 이 또한 맞는지 틀리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마지막 야히 겨레 인디언이었던 '이시'를 잘 담아냈다고 느낍니다.
최종규
어제, 《수호의 하얀 말》(한림출판사,2001)이라는 그림책을 보았습니다. 처음 나왔을 때에도 보았으나, 그때에는 시큰둥해 하면서 지나쳤습니다. 그러고서 일곱 해가 지난 뒤 다시 이 그림책을 넘겨보게 되면서, 가슴이 짠했습니다. 일곱 해 사이에 내 마음에서 무엇인가 자라나서 이 책을 알아보게 된 셈인가? 아니면, 이제 내 마음도 무엇엔가 눈을 떴는가? 아니면, 내가 책을 보는 눈길이 달라졌는가?
그림책 《수호의 하얀 말》은 일본사람 아카바 수에키치 님이 그렸습니다. 그린이는 1910년에 태어나 1932년에 만주로 건너갔다가 1947년에 일본으로 돌아왔고 1961년부터 그림책을 그렸으며, 《수호의 하얀 말》은 1967년에 그렸다고 합니다. 이 책이 2001년에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그마치 마흔한 해를 묵은 《수호의 하얀 말》이며, 이 그림책을 그린 분도 그때 쉰일곱이라는 나이였습니다.
.. “큰아버지, 어째서 우리에게는 사냥을 하기 위한 활밖에 없을까요? 어째서 적과 싸우기 위한 활, 적을 노리는 활이 없을까요?” … “주프카 신과 카르츠나 신은 의논하여 야히 족에게는 사냥하는 데 쓰는 무기만을 주기로 하고, 서로서로, 또는 이웃사람과도 평화롭게 사는 방법을 가르치기로 했단다.” .. (79∼81쪽)책 하나에 오롯이 삶을 담아내자면 이만한 세월이 걸릴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젊은 나이에 훌륭한 작품을 남기고 촛불처럼 금세 꺼져 버리는 사람도 있지만, 오래오래 살아남으며 숱한 사람을 부대끼고 일을 겪으면서 속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곰삭인 다음, 단출한 붓질로 책 하나 여미어 내게 되는가 싶기도 합니다. 아직 나이가 젊으니까, 아니, 나이보다는 철이 없으니까 주절주절 길디길게 잔소리를 늘어놓지 않느냐 싶습니다.
듣는 사람이 지루해 하지 않도록, 읽는 사람이 하품을 하지 않도록, 듣는 사람이 귀를 쫑긋 세우면서 무릎걸음으로 다가와서 눈을 반짝일 수 있도록, 읽는 사람이 앉음새를 고치고 눈에 힘을 줄 수 있도록 엮어나가는 이야기는 하루아침에 이루어 낼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이라는 시간보다도, 얼마나 땀을 바치고 마음을 쏟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느낍니다.
.. 마침내 소리도 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뭇가지를 베어 낼 수 있었다. 그들이 쓴 도구라면 돌과 흑요석 줄, 그리고 칼뿐이었다. 도끼로 찍어 넘어뜨리는 편이 손쉽고 재빠르며 훨씬 편했겠지만, 할아버지가 언제나 말했듯이 나무를 베는 소리가 나는 곳에는 언제나 반드시 사람이 있는 법이라는 것을 야히 족뿐만 아니라 사루도(백인)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그들은 저장용 튼튼한 바구니를 만들기 위해 소나무 뿌리를 캤고, 밧줄이나 끈으로 만들기 위해 삼이나 덩굴풀을 끊었고, 어머니가 죽을 끓이는 바구니 그릇에 담은 물이 새지 않도록 바구니 틈에 바를 송진을 모았다. 바삐 움직여 다니는 새도 짐승도 재잘거리는 소년과 소녀에게 조금도 마음 쓰는 것 같지 않았다. 둘은 그대로 그 풀숲 세계의 한 부분이었으므로 .. (28∼29, 31쪽)
예전에는 그냥저냥 책을 읽었습니다. 좋다고 하는 책이니 읽고, 훌륭하다고 느껴지는 책이니 읽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글쓴이가 몇 살이었고 그동안 무엇을 겪었는가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책을 엮은 사람이 누구이고 무슨 일을 해 왔는가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책을 읽기 앞서, 글쓴이나 그린이나 찍은이 나이를 살피고 발자취를 훑고 배우거나 한 일을 알아봅니다. 어느 땅 어느 일터에 몸을 담았으며, 어느 곳 어느 사람하고 어울리고 있었는가를 헤아립니다. 집안에 들여서 키우는 꽃인지, 들판에서 자라는 꽃인지, 도심지 골목길에서 시멘트를 뚫고 자란 꽃인지, 꽃집에서 돈으로 사고파는 꽃인지를 찬찬히 곱씹습니다. 자란 터전과 겪어 온 모두가 고루 섞이면서 책 하나로 담기기 때문임을 비로소 느끼고 있습니다.
.. “야히 족 사냥꾼이 손에 잡는 무기는 사람을 사냥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 “그렇다면 큰아버지, 미치지 않은 참된 사루도는 어째서 미친 사람들의 잔인한 짓을 못하게 말리지 않나요?” “그건 나도 모른다, 이시. 아무래도 나는 사루도를 이해하기에는 이미 나이가 너무 많은 것 같구나. 그러나 너희들은 아직 어리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어린 채로 있지는 않겠지. 아마도 사루도들은 노인들로부터 좋은 ‘삶의 방법’을 배우지 못했나 보다. 아니면 사막을 넘는 긴 여행을 하는 동안 노인들의 가르침을 잊고 말았거나.” .. (73∼74쪽)요즈음, 김수정 님 만화책을 하나하나 다시 끄집어내어 읽고 있습니다. 한 해에 한 번쯤 꼭 처음부터 끝까지 스무 권 남짓 되는 김수정 님 만화전집을 통째로 다시 보곤 하는데, 해마다 다시 넘기면서 해마다 다른 느낌을 받습니다. 아무래도 책을 보는 저부터 지난해와 올해가 다르기 때문이리라 봅니다. 그러께하고 지난해도 다릅니다. 제가 끄적인 글을 뒤적여 보아도, 2006년에 쓴 글하고 2007년에 쓴 글은 눈높이가 다릅니다. 2007년에 쓴 글과 2008년에 쓴 글도 높낮이가 다릅니다. 2005년이나 2004년에 쓴 글은 누구한테도 보여주기 부끄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2009년이 되면 2008년에 쓰는 이 글도 남우세스럽다고 여길 테지요.
그러나 이런 느낌은 자연스러움이라고 봅니다. 자기 삶이 한 자리에 머문다면 모르되, 자기 삶이 발돋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모르되, 자기 삶을 가꾸고자 애쓰지 않는다면 모르되, 날마다 부지런히 부대끼고 읽고 느끼고 곰삭이고 되뇌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오늘과 내일이 다를 뿐더러 아침과 저녁도 다릅니다. 지난해에 읽은 책에서 본 대목을 올해 다시 읽으며 느끼는 일이란 자연스러움입니다. 그러께 읽으며 받아들이지 못한 대목을, 이듬해에 새로 읽을 때 처음으로 깨닫게 되는 일 또한 마땅한 노릇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