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판이 끊어져 사라져 버린 책, <식민지의 아들에게>(백산서당, 1989)와 <더 이상 우리를 슬프게 하지 말라>(백산서당, 1990)가 있습니다. 헌책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책들인데, 판이 끊어진 책 목숨임을 헤아려 볼 때, 헌책방에서도 이 책을 찾아서 읽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으랴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책 두 가지를 헌책방에서 사서 읽습니다.
<식민지의 아들에게>라는 책에는 ‘발로 찾은 반미교과서’라는 작은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더 이상 우리를 슬프게 하지 말라>라는 책에는 ‘발로 찾은 주한미군범죄 45년사’라는 작은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뒤엣책 344쪽부터 370쪽까지는 깨알같은 글씨로 ‘그동안 한국땅에서 일어난 주한범죄’를 표로 만들어 붙여놓습니다. 1967년에는 어떤 일이 있었나 들여다보니, 모두 스물일곱 건에 이르는 ‘주한미군 범죄’가 적혀 있습니다.
독약을 맥주에 타서 마시게 하여 윤락녀를 죽였고, 카투사들이 잼을 많이 먹는다고 포크로 왼쪽 눈을 찌르고, 아무 까닭 없이 길 가던 사람을 두들겨팼고, 술먹고 난동부리는 짓을 막는 술집 임자를 몰려들어 두들겨팼고, 볼일 보러 주한미군 기지에 들어온 아가씨를 강간한 다음 두들겨패기까지 하고, 길을 건너던 사람을 일부러 차로 치고, 훈련을 하며 지나가던 마을에서 민가에 몰래 들어가 그 집 어머니와 딸을 한꺼번에 강간하고, 손수레 끌고 가던 농사꾼 두 사람을 차로 치여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고, 빚 갚으라고 하는 사람을 두들겨패고, 네 살짜리 계집아이를 차로 치여 죽인 뒤 12미터나 질질 끌고 가고, 몸을 팔라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아가씨 집에 불을 지르고, 음주운전을 하다가 가게를 들이받아 부수고, 술먹다 난동부리자 달려온 경찰마저 두들겨패고 …….
헌책방에서 만난 ‘주한미군 기념사진책’ <7th BN(HAWK) 2nd ARTY>(1967)를 펼쳐 봅니다. 기념사진책에 실려 있는 살갗 하얀 미국 병사 얼굴은 해맑기 그지없습니다. 모두 활짝활짝 싱글벙글 웃고 있습니다. 카투사들 얼굴만 굳어 있을 뿐, 미사일을 만지작거리거나 당구채를 들고 있는 미국 병사들은 가벼운 옷차림에 밝은 모습입니다. 몇 가지 무기 사진이 없었다면, 이 기념사진책은 ‘학교를 마치면서 받는 사진책(졸업앨범)’ 느낌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나저나, 주한미군은 무슨 생각으로 이와 같은 기념사진책을 만들었을까요. 기념사진책에 환하게 웃는 얼굴로 담긴 미국 병사들은 어찌하여 한국땅에서 수천 건에 이르는 범죄를 저지르고도 벌 한 번 제대로 받은 적이 없었을까요. 범죄목록에 나오는 이름과 기념사진책에 나오는 이름을 맞대어 본다면, 이 가운데에도 틀림없이 범죄자가 몇몇 있으리라 봅니다. 어쩌면, 경찰에 신고가 들어가고 신문이나 방송에 알려진 범죄목록만 수천 건이고, 소리소문 없이 일어났다가 묻혀 버린 범죄는 훨씬 많을는지 모릅니다.
군부대에서 만든 기념사진책이라고는 하지만, 조금도 ‘싸우는 느낌(전쟁 분위기)’이 나지 않는 이 책을 펼치는 내내, 삶과 죽음이란 무엇이며 전쟁과 평화란 무엇이며 이 땅에서 주한미군은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자꾸자꾸 겹쳐집니다. 요즈음 서울 광화문을 비롯해서 전국 곳곳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촛불모임이 ‘미친소 고기를 한국에 팔려고 하는 미국 정부’ 때문임을 헤아려 보면서, 주한미군과 미친소 고기는 따로따로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다시 한 번 <7th BN(HAWK) 2nd ARTY>를 펼칩니다. 앞쪽에 “7th Battalion 2d Artillery(2야전포병연대 7대대)”라는 말이 나오고, 이 부대가 그동안 치러 온 싸움을 죽 적어 놓습니다. 1812년에 캐나다와 싸웠고, 미국 토박이(인디언)를 seminoles라는 데에서 짓밟았으며, 1840년대에 멕시코를 식민지로 삼는 싸움을 벌인 한편, 스페인 산티아고에서, 또 1ㆍ2차 세계대전에서 싸웠다고 합니다.
덧붙이는 글 | 사진잡지 <포토넷>에 함께 싣습니다.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우리 말과 헌책방)
http://cafe.naver.com/ingol (인천 골목길 사진)
2008.07.11 15:31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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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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