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그림겉그림입니다.
검둥소
옆지기와 함께 동네 골목길을 거닐 때, 꽃그릇 소담스레 가꾸고 있는 집 앞에 오래도록 머물곤 합니다. 잠깐 쭈그려앉아서 꽃잎을 만지기도 하며, 꽃 가까이 얼굴을 내밀어 냄새를 맡기도 합니다. 옆지기는 “여기에서 그림 그려도 좋겠다”고 말하고, 저는 ‘그 자리에서 여러 모습으로 사진을 찍’습니다. 다음에 이 앞을 다시 지날 때면 또 한 번 사진을 담습니다. 겨울날, 꽃그릇이 텅 비었을 때부터 봄날, 새싹이 돋을 때와 여름날, 차츰 줄기가 물이 오를 때에다가 가을날, 잎이 지고 떨어질 때까지, 네 철에 따라 같은 골목을 오가며 꽃을 구경하고 느끼고 사진으로 담습니다.
.. 땅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설사 부분적으로 포장이 되어 있더라도 주위를 둘러보라. 그리고 개체들에 가까이 다가가라. 그러면 그곳에서 나뭇잎, 꽃, 곤충, 바위, 혹은 지렁이 똥을 손쉽게 관찰할 수 있다 .. (50쪽)처음 골목마실을 할 때에는 꽃그릇에 그렇게까지 눈길을 두지 못했습니다. 아니, 눈길을 안 두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어릴 적 뛰놀던 골목이 어디였을까를 헤아려 보았습니다. 지난날과 오늘날 얼마나 바뀌거나 그대로인가를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옛동무가 아직도 살고 있나 궁금하기도 했고, 천천히 거니는 우리를 알아볼 옛이웃이 아직 있나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골목길에 골목꽃이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 있었건만, 발걸음을 멈추고 지긋이 바라보고 마음에 담을 줄 몰랐어요.
어쩌면, 지난 몇 해 사이 뺑소니 자전거 사고 때문에 팔다리가 다쳐서 자전거도 많이 망가지고 몸도 여러모로 다치지 않았더라면, 인천에서 서울로, 또 인천에서 수원으로, 또 인천에서 목포로 부지런히 자전거로 내달리기만 하며 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거님길과 골목길은 자전거로 내달리기에 알맞지 않으니, 자전거 타기만 즐긴다면 자동차 달리는 찻길로 똑같이 달렸겠지요. 그러면서 더더욱 골목빛깔과 골목맛과 골목냄새는 못 느끼었지 싶어요.
외려, 자전거를 타기 힘든 몸이 된 보람이라고 할까요. 두 다리로만 걸으며 돌아다니게 된 뒤로, 자전거로는 안 갔을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고, 까마득한 계단골목을 거닙니다. 손수레 하나 지나갈 틈이 없어서, 이 골목에서 사는 분은 짐을 옮길 때마다 애먹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지만, 어느 한편으로는 골목집 사람들은 집옮기는 일이 드뭅니다. 재개발이라 하며 쫓아내기 앞서까지는 한 집에서 오래오래 머뭅니다. 한 집에서 서른 해를 살고 쉰 해를 사니, 구태여 골목이 넓어야 하지 않습니다. 모든 볼일을 두 다리로 걸어서 오가면서 보시니 굳이 자동차가 안 들어와도 됩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살고 있으며 다니고 있는 골목 문화는, 우리들 맨몸뚱이로 가꾸는 삶터에서 시나브로 일구어 왔구나 싶더군요. 대단한 사람들이 들여다보아 주지 않아도 되는 삶터이고, 이웃사람과 오순도순 나누면 넉넉한 삶터인 한편, 이웃사람이 자주 놀러오지 않아도 스스로 즐거워서 일구는 삶터입니다.
사람이 건드리지 않으면,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가득한 동네 어느 틈바구니에 한 포기 두 포기 풀이 돋으면서 이윽고 풀밭을 이루게 되듯, 개발업자와 공무원이 건드리지 않으면 골목사람 스스로 골목길을 살뜰하게 아름답게 손질하고 보듬습니다.
사람들이 자주 옮겨다니는 동네하고, 사람들이 거의 옮겨다니지 않는 동네는, 몇 분만 걸어 보면 금세 알겠더군요. 토박이로 뿌리내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동네에는 어디에나 골목골목 꽃그릇이 가득 놓여 있습니다. 그닥 크지 않은 플라스틱통에 나무를 심어 기릅니다. 가로세로 1미터 될락 말락 한 흙땅에서 감나무와 앵두나무와 복숭아나무가 우람하게 자라서 스무 해도 서른 해도 야무진 열매를 맺는 모습을 봅니다. 돈 주고 사먹는 감이 아닙니다. 기나긴 세월을 날마다 물을 주고 북을 돋우고 거름을 내면서 가꾼 감나무에 열린 열매를 따먹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