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일 오후 전대협 깃발에 모인 500여명의 시민들이 서울시청을 출발, 청계천을 거쳐 종로구청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안홍기
대학 신입생이던 1991년, 그 해 봄을 잊을 수가 없지. 3월부터 6월까지 10여 명이 죽었어. 고등학생·대학생·노동자가 죽었지. 시위하다 전경에 맞아 죽고, 거기에 항의해 투신 또는 분신하여 죽었지. 일주일에 한 명씩 죽어나가는 거리에 나가려면 말 그대로 죽을 결심을 해야 했지. 그 시절엔 밤이 되면 라이터를 켰어. 종로를 메운 군중이 구호를 외칠 때마다 무수한 별빛처럼 명멸했던 라이터 불을 보며 우리는 환호했지. 해직된 옛 선생님들도 만났지. 이젠 대학생이 된 제자들과 함께 어깨동무하고 선생님들도 함께 데모를 했지. 87년 6월 이후 최대의 인파라고, 드디어 뒤집어진다고, 우리는 흥분했지.
그 다음의 일도 기억나지? 다시 한 번 <조선일보>가 '죽음의 굿판' 운운하며 우리를 악의 화신으로 만들었지. 동료의 투신자살을 부추겨 유서까지 대신 쓰는 피도 눈물도 없는 빨갱이들이라고 몰아갔지. 각계각층에 주사파가 침투해 있다고 선전했지. 장관에게 계란과 밀가루를 던지는 대학생들을 희대의 패륜아라고 손가락질했지. 공권력이 대학생을 때려죽일 때, 우리는 왜 밀가루조차 던지면 안 되는 것인지, 우리는 정말 알지 못했지. 그리고 거짓말처럼 세상은 조용해졌지. 신문과 방송은 소련의 붕괴를 축하하고, 빨갱이들의 시대가 완전히 끝났다고 선언했지.
대학 졸업을 눈앞에 둔 1996년, 아마도 90년대의 진정한 마지막이라 할 만한 그 때, 우리는 연세대에 있었지. <조선일보>는 한총련 출범식에 모여든 대학생들을 북한의 지령을 받아 움직이는 주사파 집단으로 매도했지. 일본 전공투와 비교하면서 극렬 테러집단으로 몰아갔지. 경찰은 들어오는 길, 나가는 길을 통째로 막았지. 배가 고파도 먹을 것조차 없었지.
그렇게 열흘 동안 학생들을 굶겨 힘을 빼고, 일시에 진입해 모두 잡아갔지. 몰아놓고 때려잡는 토끼몰이식 진압의 초대형 버전이 그 때 만들어졌지. 10여 대의 헬기를 띄워 사실상의 군사작전을 펼쳤지. 그렇게 5800명의 학생들이 일시에 끌려갔지. 우리 같은 놈들을 선배라고 믿고 따라온 1학년·2학년 후배들이 많이 잡혀 갔지. 선배들은 분해서 울었고, 후배들은 무서워서 울었지.
장렬하게 절망스럽던 그 때의 데모들다시는 데모 같은 거 하지 않겠다고, 자아도취에 불과한 시위 따윈 아예 때려치고, 진짜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만한 일을 하겠다고. 우리는 결심했지. 너는 시민운동을 택했고, 나는 언론을 택했지.
그리하여 진걸아, 너와 내가 기억하는 모든 데모는 장렬했지만 절망적인 것이었지. 우리는 청바지에 청재킷을 입고 번개처럼 달려와 시위대의 머리를 잡아채 강력한 헤드락을 걸고 니킥으로 명치를 가격하는 백골단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지. 닭장차에 갇히는 순간 시작되는 전경들의 무수한 발길질이 왜 죽음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지 잘 알지. 누구건 마음만 먹으면 빨갱이로 낙인찍어 감옥에 보내버리는 <조선일보>가 얼마나 거대하고 강력한지를 잘 알지. 공안정국이 일단 시작되면, 세상 모든 항의의 목소리가 통째로 사라져버린다는 것도 잘 알지. 그게 보수정치의 본질이라는 것도 너무너무 잘 알지.
1998년 초, 너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그 기억을 모두 나누고 있었지. 80년 광주항쟁처럼 시대를 넘어 추앙받지 못하고, 87년 민주항쟁처럼 승리의 기억으로 뭉친 하나의 세대를 낳지도 못했던 너와 나의 그 '데모들'은 오직 우리끼리만 서로 위로할 수 있는 것이었지. - 거대한 절망. 그것에 대해 우리는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지. 아무도 우리의 비극을 모를 거라고 제 슬픔에 취해 술잔을 기울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