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0일 광화문. 한 보수단체의 회원이 우산에 촛불시위를 반대한다는 피켓을 붙여놓고 계단에 앉아 있다. 옆에는 각목이 놓여 있다. 이것은 '의도된 폭력'이다. 촛불을 이전투구의 양상으로 빠뜨리려는 낚시질용 몽둥이인 셈이다. 정부는 이들에게 집회를 허락했다.
오승주
촛불세력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촛불문화제의 국면은 여러 모로 볼 때 동학농민전쟁과 유사하며 그 결말도 이와 같을지 우려된다. 정부가 미국과의 협상 결과를 명분으로 내세워 '명분싸움'이 벌어진다면 촛불세력은 수세에 몰릴 수 있다. 청군과 일본군의 역할은 고엽제전우회와 뉴라이트연대가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국은 이들에게 집회허가를 내줌으로써 촛불문화제를 '불법시위'로 보이게 하고, 보수 단체가 폭력적으로 대응할수록 당국은 미소를 짓게 된다. 왜냐하면 촛불세력이 흥분해 폭력으로 대응하면 이전투구의 양상 속으로 이들을 가둬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촛불세력은 국민의 지지를 점점 잃어갈 것이다.
세 번째는 장비다. 살수차와 휴대용 소화기, 대형 컨테이너와 수많은 닭장차로 무장한 경찰을 상대하는 촛불세력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일 수밖에 없다. 촛불세력은 이런 불안 요소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촛불의 성격을 엄밀히 따져보자. 촛불을 일어나게 한 원인을 따져보면 일단 이명박 정부의 실정에 대한 반발이 직접적인 동기였고, 국민들의 지지 역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촛불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수세적인 기반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야당과 학계, 시민단체 등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야 하는 이유다. 만약 이명박 실정이 구조적인 모순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이 모순을 깨뜨릴 대안이 제시돼야 하며, 이명박 실정에 대한 반발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이명박 정부는 포장과 눈속임으로 실정을 감출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반발은 곧 수그러들 것이다. 촛불이 갇힌 프레임이다.
촛불은 비폭력을 무기로 삼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촛불은 물리력이다. 폭력을 쓰지는 않았지만, 초를 들어야 하고 거리로 나가야 하고, 거리행진을 하면서 차량의 이동을 방해하는 모든 움직임이 물리량이다. 하지만 물리력은 한계가 있다. '물리적인 촛불'에 갇힌다면 촛불은 당연히 꺼질 수밖에 없다. 다양한 빛깔로 분출돼 물리적인 한계를 극복해야 촛불이 계속 불붙을 수 있다.
비폭력과 물리력의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지도 관건이다. 촛불이 과연 비폭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도 불안하다. 만약 촛불이 고엽제 전우회 같은 단체와 맞서 폭력을 사용한다면 촛불국면은 매우 빠른 속도로 사그러들 것이다.
촛불이 승리해야 하는 이유후마니타스의 박상훈 대표는 경향신문, 진보신당 주최로 17일 서울 여의도 진보신당 회의실에서 열린 긴급 시국 대토론회 제2차 ‘촛불집회와 진보정당의 과제’에서 촛불집회로 한국 사회 내의 구조와 제도로서 정치의 보수성이 해체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화될 것으로 예상했다.
1990년과 91년의 5월 정국, 97년 총파업, 2000년 촛불정국, 2004년 탄핵정국 등 대규모 운동의 개입기를 제외하면 나머지 정치의 세계는 계속해서 보수적 독점체제의 지속으로 나타난 것을 주장의 근거다. “광범한 대중적 참여와 운동의 시기에는 어떤 변화라도 가능할 것 같은 집합적 열망의 분출이 일순간 국면을 휩쓸다가도, 어느 순간 상황은 종결되고 탈동원화와 일상화의 주기로 돌아가 버린다”는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싸늘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87년 민주화행쟁 이후에 우리 사회가 얼마나 속물화되고 보수화됐는지, 그것도 민주화행쟁을 주도한 사람들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모습을 분명히 보았다. 자신이 386이면서 386을 정말 싫어한다는 우석훈 씨는 <88만원 세대>에서 386을 68세대와 비교해 비판했다.
프랑스의 68세대와는 달리 386의 자기 결집은 사회에 대한 긍정적 효과를 만들어 다음 세대에게 더 많은 기회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진화하지 못했다. (중략) 프랑스나 독일과 같은 유럽 국가들의 68세대들이 공교육 체계를 대학까지 연장시키면서 다음 세대들이 보다 다양한 교육의 기회를 가지고 20살에 독립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은 반면 우리나라의 386은 학벌주의와 겨에엘리트주의를 더욱 강화시키는 반작용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중략) 지금 10대와 20대가 맞게 된 조금 황당한 상황들은 사실 이 386세대에게 상당한 역사적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177~178쪽>내가 가장 우려하는 상황은 '촛불'이 '무덤의 추억'으로 남는 것이다. 우리는 87의 성과를 추억할 뿐, 실패의 폐해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시민들이 꿈꾸는 세상과 변화에 대한 희망은 이미 죽어서 무덤에 묻혔는데, 무덤 앞에서 울면서 그 날의 상황을 추억하지만, 추억은 추억일 뿐이다. 2008년에도 신문지상에서 동일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정론지들은 촛불을 찬양하며 엄청난 지면을 촛불에게 바치고 있다. 촛불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보는 시각이 매우 귀하게 됐다. 100만인 행진이 어떻다는 말인가? 100만인 행진은 그 결과로 연결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모든 상황이 끝나고 다시 속물화된 일상을 살아가면서 '나도 한때는 촛불을 들고 광화문을 누볐지' 하는 초라한 추억으로 자위를 하지 않으려면 이번 전쟁은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거리에서 타오른 물리적인 촛불은 반드시 다른 곳으로 옮겨붙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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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놀이 책>,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 <공자, 사람답게 사는 인의 세상을 열다> 이제 세 권째네요. 네 번째는 사마천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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