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정전. 심양 황궁에 있는 대정전은 소현세자가 책봉식을 거행했던 곳이다.
이정근
소원 조씨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인조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강사포(絳紗袍)는 임금이 입는 옷이고 적의(翟衣)는 왕비가 입는 옷이다.
조선의 왕은 자신이고 아직 나이가 어리지만 중전이 두 눈을 버젓이 뜨고 여기에 살아있는데 세자와 세자빈이 심양에서 왕과 왕비의 복장을 하였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창백하게 일그러지던 인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소원의 손을 잡고 있던 인조가 손을 놓았다. 놓았다기 보다도 근육이 스르르 풀렸다. 그리고 힘들게 받치고 있던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편안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구름을 타고 가는 듯했다. 산도 없고 내도 없고 바다도 없었다. 끝이 없는 현황(玄黃)을 나는 것만 같았다.
"전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정신을 차리십시오."귀에 익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점점 멀어져 갔다. 따라오는 사람도 없고 앞서가는 사람도 없다. 얼마쯤 갔을까. 장승 같은 사람이 길을 막고 서있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붉은 옷을 걸친 바위같이 큰 사람이었다. 자세히 바라보았다. 소현이었다.
환상 속에서 만난 아들 소현세자, 그러나 실망스러웠다"네 놈이 기어코 오랑캐가 시키는 대로 왕의 옷을 입었다더냐?""아닙니다. 아바마마. 저들이 강사포를 입어라 했지만 소신이 물리치고 오장복을 입었습니다."소현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용골대가 찾아와 강사포를 입어라 강요했지만 한사코 물리치고 칠장복도 아닌 오장복(五章服)을 입었다는 사실을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빈궁의 적의는 무엇이더냐?""마땅한 예복을 구할 수 없어 마지못해 입었으나 오조룡보를 떼고 사조룡보를 붙였습니다.""듣기 싫다. 오랑캐의 주구가 되는 것도 역겨웁거늘 적의를 입었다니 용서할 수 없다.""아바마마 오해이십니다.""닥쳐라. 세자와 빈궁은 용서할 수 없다.""아바마마. 소신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타고 가던 구름이 갑자기 수천 길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것만 같았다. 깜짝 놀란 인조가 팔을 내저으며 소리를 질렀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임금의 헛소리"닥쳐라. 용서할 수 없다.""전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신 차리십시오."혼수상태에 빠진 인조를 바라보던 소원 조씨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혼절했던 사람이 식은땀을 흘리며 헛소리를 하고 있지 않은가.
"물, 물을 가져와라. 목이 마르다."나인이 대령한 물을 마신 인조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전하. 정신을 차리십시오.""내가 꿈을 꾼 모양이로구나."꿈이 아니었다. 혼수상태에서 소현세자를 만난 것이다. 보고 싶은 아들을 만났지만 애틋한 심정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마음으로 만난 것이다. 현실과 환상은 분명 다르지만 증오의 찌꺼기가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