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그림둘이 걸어다니며 즐기던 여행 이야기를 담은 책 하나
샨티
옆지기하고 '먼 나들이를 하기로 했으나, 좀처럼 짬을 못 내고 있습니다. 금ㆍ토ㆍ일에 도서관 문을 열어 놓고 있어야 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사는 동네를 하루빨리 재개발과 재생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쓸어내 버리고 싶어하는 인천시장과 개발업자하고 싸우는 일을 거드느라 이틀이나 사흘쯤 자리를 비우고 떠나는 일도 못하는 판입니다. 우리 두 사람이 없다고 해서 일손이 줄어들거나 모자라지 않겠지, 하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막상 여러 가지 일이 닥치다 보면, 참말 일손이 없습니다. 사진을 찍어 주는 사람도 없고, 이야기를 글로 남겨 주는 사람도 없고, 그보다 자질구레한 온갖 일을 맡아 주는 ‘한 사람 손길’이 그립곤 합니다.
몸이 더 무거워지기 앞서 다문 이틀이나 사흘이라도 맑은 숨과 따순 볕을 누릴 수 있는 곳에서 지내 보고 싶은데, 다른 일거리 걱정이 없이 자전거를 달리고 싶기도 한데, 풀숲이 우거진 그늘에서 실컷 단잠을 자 보고 싶은데, 내리쬐는 햇볕을 고스란히 받으면서 흙길을 걸어 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마음이 바쁜 탓일 테지요. 스스로 느긋하지 못한 탓일 테지요. 바쁘다는 말은 핑계이고, 떠날 마음이, 움직일 마음이, 돌아다닐 마음이 없거나 얕은 탓일 테지요.
.. 반지하 원룸에서 혼자 웅크리고 살다가 34층 고층으로 뛰어올라 한강 야경을 누리며 살았을 때, 그리고 그 집에서 내려왔을 때, 나는 다시는 되돌리기 어려울 어떤 방향을 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내가 아프지 않을 집, 숨쉴 수 있는 집, 같이 꿈꾸는 집, 덜 벌고 덜 쓰며 나를 충족하고 나를 살릴 수 있는 집으로 한 발씩 나아가는 일이었다 .. (239쪽)모자라나마 낮 나절에라도 한 시간 남짓 동네 골목길 마실을 합니다. 저녁 나절에도 한 시간 남짓 골목길을 떠돌곤 합니다. 흙이 아닌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발라진 길이긴 하지만, 한 층짜리 집으로 이루어진 골목길을 거닐면서, 차소리가 아닌 사람 사는 소리를 듣습니다. 창가로 흘러나오는 텔레비전 소리와 이야기 소리와 도마질 소리를 듣습니다. 때때로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여름임에도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를 듣습니다. 예순 넘은 나이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라고도 할 수 없을 만큼, 일흔 여든 넘은 분들이 많이 사는 오래된 동네이다 보니, 여름에도 보일러를 돌리며 방을 데웁니다.
.. 온전히 하루 이상을 걸어 본 사람이라면 걷기를 조금씩 길게 거듭할수록 알게 되는 재미가 있다. 배낭 속 목록이 하나둘 줄어가면서 몸과 마음의 무게도 가벼워지는 맛, 불필요하게 불었던 살이 쪽쪽 빠지는 기분, 보잘것없는 한 가지라도 짐을 줄이면 몸과 마음은 환히 빛난다 .. (20쪽) 골목길을 거닐며 골목집 담벼락을 쓰다듬기도 하고, 늘 대문 바깥, 울타리 따라 나란히 놓아 둔 꽃그릇을 가만히 들여다보기도 합니다. 새벽에 들여다볼 때, 낮에 들여다볼 때, 저녁에 들여다볼 때, 밤에 들여다볼 때 모두 다릅니다. 빛줄기에 따라서, 또 거리등 불빛에 따라서 생김새도 모양새도 다르게 느껴집니다.
골목길 앵두나무가 좋아서 마냥 사진만 찍었는데, 그제 앵두나무 열매를 다시 보려고 그곳으로 갔더니 그새 아직 덜 여문 열매까지 따 버리고 없더군요. 덜 여문 열매까지 따 간 모습을 보면, 나무 임자가 그러지는 않았을 테고, 몰래 훔쳐서 먹는다고 해도, 덜 여문 열매는 남겨 놓아야지, 원.
.. 바닷가 마을에서 본 아이들은 아무도 똑바로 걷지 않았다. 왔다갔다 제멋대로 걸었다. 살아 있는 제 몸에 맞게 움직이며 길을 걸을 줄 알았다. 그런 아이를 데려다가 줄 맞추게 하고 일렬로 걷게 훈련시키는 학교를 오래 다녀선지, 또는 운전을 시작한 다음부턴지, 나는 직진의 대로를 직선 코스로 가는 것만이 길인 양 착각하고 살아온 것이다. 해안가의 길도 대부분 곧고 넓게 뻗은 길이 차지하고 있었다 .. (90∼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