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으로 서로 어색함을 달래는 부모님
민종원
어버이날(5.8)에서 한 주 정도 지난 어느 날 저녁이었습니다. TV를 보시던 어머니께서 북한 식량배급 장면을 보시다가 무어라 속삭이시더군요.
"에유, 애들 밥을 양재기에 주네.""우리 어릴 때는 다 앵재기에 주고 죽 앉혀서 먹였지. 그땐 그랬어."마침 방에서 나오다가 어머니 말씀을 들은 저는 갑자기 어머니 삶에 대해 묻고 싶어졌습니다. 장사도 꽤 해 보셨던 어머니는 어릴 적 식모살이도 해보셨고 심지어는 다른 나라 사람이 될 뻔하기도 했다는 얘기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갑자기 그때 그 말씀을 좀 더 듣고 싶어졌죠. 그렇게 저는 어머니와 시간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떠난 시간 여행 우선, 아버지께 첫 질문을 드렸습니다. 어머니와 단 둘이서 떠나는 여행을 하기 전에 아버지를 챙겨드릴 필요가 있었거든요. 일종의 안전장치를 해둔 셈이죠. 무작정 질문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몇 학년까지 다니셨어요?"나? 어… 6학년까지… 다니다 말았지."
그때 어머니께서 끼어드시면서 모자간 대화로 자연스레 흘러갔습니다.
"애걔걔, 거짓말. 6학년 다닌 사람 글씨 쓰는 게 그 모양이야? 난 2학년만 나왔어도 잘만 쓴다, 뭐"
-어머니는 제 나이에 학교 다니셨어요?"아니, 한참 (나이) 먹어서 갔지. 한 10살 때쯤? 에구, 큰이모(어머니 언니)도 다니다 말았어. 자식들이 다 그 모양이었지. 그래도 다 그런 건 아니었구."
제가 알기로도 삼촌 한 분은 중학교를 다니셨지요. 교복 입고 찍은 사진도 본 적이 있고요.
"성경 보면서 글 좀 배웠지. 한 글자 한 글자 보면서 배웠다. 머리 다 허~예져 가지구."그랬습니다. 10년 전 처음 교회를 다니신 어머니는 그때서야 날마다 글을 배우셨습니다. 남들처럼 성경을 볼 줄 알아야 하니 당연히 읽고 또 읽을 수밖에 없었죠. 그렇게 어머니는 못배운 한을 조금씩 푸셨습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기쁨도 누리면서 말이죠.
"영이, 바둑이 그런 거 우리도 배웠어. 그리고 구구단도 배웠지, 아마."영이, 바둑이는 저도 아는 건데 어떻게 된 일일까요? 어머니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이면 50년대인데 말이죠. 저희 어머니는 43년생이거든요. 10살 때쯤 학교를 다니셨다니 한 53에서 54년쯤 되네요.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어머니께서 또 말씀을 하셨습니다.
"책보 허리에 매고 다녔지. 아니면, 책보를 아예 들고 다니든가. 고무줄 있으면 허리에 매고 그랬지."가방은 가지고 다니셨냐는 제 질문에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중간에 아버지께서 "남자는 어깨에 이렇게(대각선으로) 매고"라고 거들어 주시면서 그때 그시절 모습을 조금은 상상해볼 수 있었습니다. TV를 통해서 어려운 시절 학생들 모습을 본 적이 있으니까요. 하긴, 그 시절에 지금과 같은 가방을 들고 다니셨을 리가 없지요. 전쟁 직후에 초등학교를 다니신 건데 그 모양새가 어련했겠습니까.
"가방이 어딨냐, 가방이. 양말도 다 꿰매고 다녔는데. 양말도 사는 게 아니야. 옷 아니 담요 그런 거 찢어서 (양말로 만들어 신었지)."-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미군이 준 담요 말야."
-그걸로 뭘 어쨌다는 거예요? 이불로 쓰신 거 아니에요?"아니, 그땐 겨울에 엄청 추우니까 그런 걸로는 안 되지. 그래도 겨울엔 솜이불 어떻게 해서 썼지. 그거(미군이 준 담요)는 몸빼 해 입고 양말 해 입고 그런 거야."
"그땐 추워서 바퀴벌레도 얼어 죽었어"저는 이 대목부터 조금씩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여러 대목 듣게 되었습니다. 미군 담요란 게 정확히 뭘 말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걸로 양말을 해 입는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었죠. 하여튼 뭐든 지금처럼 사서 쓰는 시절이 아니었던 건 분명합니다. 누구 말마따나 밥 없으면 라면 먹으면 되는 시절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70년대, 60년대도 아니고 50년대 초반에 학교를 다니셨으니 말이죠.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을 다 이해하기도 어려웠고 그렇다고 일일이 말을 끊고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그냥 하염없이 계속 들었습니다.
"아, 그리고 그땐 하도 (겨울마다) 추워서 바퀴(벌레)도 얼어죽더라. 아침에 보면 다 죽어있어. 하여튼 그땐 다 더러웠어. 다들 지저분하게 다녔지. 에구, 드러버라."그때 풍경이 떠오르신 듯 치를 떨며 '더럽다'는 말씀을 그렇게 반복하고 또 반복하셨죠. 그리고, 제가 뭘 여쭈어볼 틈도 없이 당신 혼자서 그 시절로 돌아가서 계속 말씀을 풀어놓으셨습니다.
"수수하고 알레미쌀(미국에서 준 쌀이라는 말씀) 그거 먹고 그랬지. 동네에서 강냉이 죽 쓰면 그거 얻어다 먹기도 하고. 아, 학교에서는 우유를 종이에다 싸 주고 그랬어."저는 여기서 처음으로 '잠깐'을 외쳤습니다. 우유를 종이에 싸주었다? 이게 뭘까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잠깐만요. 우유를 어떻게 해 주었다고요? 종이에… 싸 줬다고요? 우유를? 가루인가?"그래, 가루우유지. 아기 분유처럼 가루였다구. 그거 종이에 싸서 주기도 하고 점심 때는 죽처럼 끓여서 주기도 했지."
TV에서만 보던 '그때 그 시절'이 제 눈앞에서 펼쳐지더군요. 미군이 준 물건들로 겨울을 나고 입맛을 다시던 시절. 학교도 학생도 선생님도 모두 어렵던 그 시절. 너나 할 것 없이 구호물품으로 살던 시절. 어머니는 그런 시절에 초등학교를 다니셨습니다. 그것도 한 2년 정도만. 제가 문득 '그때 그 시절'을 상상해보려고 노력하는 사이, 어머니는 또 다시 말씀을 풀어내십니다. 작심하고 어머니 이야기를 적는 저를 말동무 삼으신 게죠.
"고무장갑도 없어서 얼음 깨고 빨래했어. 빨기나 좋았나? 다 그 딱딱한 광목에, 이구. 날은 추워가지고 만날 동태처럼 꽁꽁 얼고 그랬지. 방에 널부러지게 늘어놓고 녹이고 그랬지. 그래도 밤엔 방에 장작으로 따뜻하고 해서 지내고 그랬어."혼자 중얼대기 시작하시는 어머니와 대화를 이어가고자 제가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43년에서 10년 뒤면 53년쯤 되는데요? 학교 어땠어요?"어떻긴 뭘 어때? 전쟁 뒤라 다들 지저분했지. 선생도 마찬가지고…. 에휴. 미군이 뭘 던져줘. 노란 껌, 쪼코레(초콜릿) 그런 거. 까만 거 뭣도 봉지에다 준 적 있는데… 아, 그래 커피였어, 커피. 맞다, 커피였다. 써서 못 먹었지."
그랬나요? 커피도 그렇게 봉지에다 담아 주기도 했나 봅니다. 지금이야 흔한 게 커피지만 그땐 먹어보긴커녕 보는 것도 어려운 시절이었을 테니까요. 그게 써서 먹다 말았다고 하시네요.
-책상은요?"앉아서 공부했어."
-의자에요?"의자? 의자는 무슨. 그냥 바닥에 앉아서 했다구. 걸상 그런 건 훨씬 나중에나 생긴 거고 책상도 제대로 있었나? 다들 엎드려서 쓰고 그랬지."
아~ 모든 게 엉망이었군요. 먹는 것도 얻어먹는 게 수두룩하고, 학교도 지금과는 상당히 다를 수밖에 없고 말이죠. 뭐 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저를 놔두시고 어머니는 제게 시간 여행을 재촉하시곤 했습니다. 도대체 언제 끝날지 모를 그런 얘기가 되어버렸죠.
"보리밥 싸오는 애 있으면 그거 좀 얻어먹기도 했어. 그거 얻어먹던 생각나네, 에구. 꽁보리밥 그거지. 시퍼런 거 김치 싸오는 애도 있고."-네? 시퍼런 거 뭐요?"아니, 그땐 뭐든 제대로 된 거 없었어. 김치냐구 그게 김치야. 대충 뭐 시래기 그런 거 김치였지. 지금처럼 이런 저런 김치 먹고 산 게 아니라구. 하여튼, 그땐 다 그랬어."
"그땐 다 그랬어."
그 한 마디에 지난 모든 삶이 어우러지곤 했습니다. 그 말 한 마디는 어머니 인생이 결코 한두 시간으로 정리할 수 없는 것임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고, '그때 그 시절'을 살아냈던 우리네 부모님들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여하튼, 저는 언제 끝날지 모를 어머니 이야기를 적고 또 적었습니다. 지금 여기에 다 적지 못할 만큼. 그것도 한 시간 남짓한 시간에 말이죠. 아들은 이렇게 어머니 삶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