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림이야기책 《낙타굼》
그림이야기책 《낙타굼》을 읽습니다. 책에 나오는 ‘한구름’이라는 아이는 여느 아이와 견준다면 느릿느릿 말을 하거나 움직입니다. 구름이는 저한테 가장 알맞고 좋은 빠르기로 말을 하고 움직이건만, 둘레에서는 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껴안지 못합니다. 나이든 교장 할머니는 아이이름을 ‘한굼’이라고 잘못 알아습니다. 여기에다가 구름이네 담임 선생이 “이야, 교장 선생님이 우리 구름이가 굼뜨다는 걸 알아보고 그렇게 말씀하셨나 보네.(10쪽)” 하고 말합니다. 구름이는 얼결에 ‘굼’이라는 딴이름을 얻습니다. 짓궂은 아이들은 사막을 걷는 낙타를 텔레비전에서 보고 나서 구름이한테 아예 ‘낙타굼’이라고까지 놀림 비슷한 딴이름을 지어 부릅니다.
그러나 구름이는 자기를 굼이라고 부르나 구름이라고 부르나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낙타라는 짐승을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자기한테는 자기 이름이 있기도 하지만, 남들이 어떻게 부르거나 찧거나 자기 마음을 간직하면서 가꾸면 될 뿐입니다.
.. “먼 길을 건너는 일이 힘이 들기는 하지만 지겨운 적은 없었어.” 어린 낙타는 끝도 없이 펼쳐진 사막 위에서 길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줬어. 하루하루 별자리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살피고, 바람 냄새가 어떻게 다른지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 굳이 지겨운 때가 있다면 그런 것들을 놓쳐서 방향을 잃어 헤맬 때지만, 그렇더라도 걸음을 멈추지는 않아. 그때부터는 기다리는 거지. 기다리면 곧 찾아질 거라는 걸 믿으니까 .. (53쪽)
어머니는 없이, 아버지는 있는 둥 마는 둥하는 구름이입니다. 구름이한테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고, 좁다고 할 만한 집입니다. 그래도 구름이는 싫어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아끼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마음을 느낍니다. 어쩌면, 이와 같은 마음으로 동무들을 바라보는지 모릅니다. 동무들 노는 품새를, 또 서로 복닥이는 품새를 가만히 바라보고 되새기는지 모릅니다.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는 눈길로, 어느 한 가지로 사람을 못박지 않는 마음으로, 조용하게 지내는 구름이가 아닐까 싶어요. 어느 어른이 이끄는 대로 가지 않는 구름이이고, 스스로 길을 헤아리고 찾는 구름이가 아니랴 싶습니다. 더 높은 자리를 바라지 않고, 더 큰 자리를 꿈꾸지 않으며, 지금 자기한테 가장 소중하며 아름다운 자리가 어디일까를 알고 싶은 구름이로구나 싶습니다.
제 깜냥껏 느끼는 어머니와 아버지, 옆에서 늘 마주하면서 느끼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또 학교에서 자기한테 다가오는 모습으로 돌아보는 선생님들과 동무들입니다. 어떠한 물결에도 휩쓸리지 않고 있으니, 선생님이나 동무들이 보기에는 ‘거의 없는 아이’처럼 느껴진다고 할 터이나, 구름이는 늘 구름이 자리에 있습니다. 선생님들이나 동무들로서는 ‘구름이 자리가 무엇인지’를 모르거나 알려고 하지 않을 뿐입니다. 생각해 보면, 선생님들 스스로 자기 자리가 어디인지를 찬찬히 헤아리지 못하기에 구름이 자리를 못 보는지 모릅니다. 아이들 스스로 자기 자리가 어디일까 가만히 찾아보지 않기에 구름이 자리를 못 느끼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구름이는 서운해하지 않습니다. 슬퍼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제 마음속에서 풀지 못하는 응어리 하나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조용히 묻습니다. 이렇게 조용히 묻는 말에, 꿈인 듯 꿈이 아닌 듯, 낙타 한 마리가 찾아와서 넌지시 이야기를 건넵니다. 그리고 구름이는 이 이야기를 곱새기고 되새기면서 자기 자리를 더욱 튼튼하게 추스르는 힘을 얻습니다.
(3) 반가움과 아쉬움
그림이야기책 《낙타굼》을 덮고 나서 글쓴이 머리말을 읽습니다. 글쓴이 박기범 님은 “내가 닮고 싶은 아이들의 눈길과 목소리, 아이들의 느낌으로 한바탕 즐겁게 놀아” 보고 싶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무래도 이 책 《낙타굼》은 곧게 제 길을 걸어가면서 외롭지 않은 아이한테 바치고 싶은 선물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아이를 외롭겠구나 느끼는 동무나 어른이야말로 정작 자기 외로움을 모르는 채 제 삶을 놓치며 헛구름을 잡고 있음을 들려주고 싶어서 내어놓은 선물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언뜻선뜻 느끼기로는 조금 어두워 보이는 이야기일 수 있지만, 검정이라고 어둡거나 하양이라고 밝으란 법이 없습니다. 검정이 밝기도 하고 하양이 어둡기도 합니다. 제자리에서 제 모습을 가꾸고 있으면, 어떠한 빛깔이라도 밝음을 고이 간직합니다. 제자리가 아닌 남 자리를 자꾸 넘보거나 기웃거리면, 어떠한 빛깔이라도 어두움이 스며들기 마련입니다.
이야기책 흐름을 헤아리건대, 그림이 지나치게 어둡지 않나 싶습니다. 어린이 한구름은 곧게 제 길을 잘 걸어가고 있는데, 이 어린이를 바라보는 우리들 어른 눈길이 한켠으로 굽은 채 어둡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조금 더 가볍게, 한손에 얹힌 짐을 내려놓고 아이들을 바라보고 껴안을 수 있으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껴안을 수 있지만, 아이들이 우리 어른들을 껴안아 주지도 않느냐 생각해 봅니다. 아이들을 껴안으려는 ‘위에 올라선 생각’이 아니라, 아이한테 껴안기기도 하는 ‘같은 자리 생각’으로 사잇그림을 넣었다면, 그림이야기책 《낙타굼》이 담은 맛이 한결 살아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 걷지 않으면 뭘 할 건데?
- 곧 찾아질 거라는 걸 믿으니까.
- 참을 수 있는 거라지.
- 놀리려던 건 아니고 …… 재미있어 그런 거였지.
- 뜻 같은 거야.
그리고, 글쓴이 박기범 님 글을 살피면, ‘것(거)’이 지나치게 자주 보입니다. 입말을 살리려는 마음으로 이 말투를 썼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어쩌다가 한두 번 쓰이는 ‘것(거)’이 아니라 때와 곳을 가리지 않고 지나치게 튀어나오는 ‘것(거)’은 외려 읽는 흐름을 끊어 놓습니다. 오늘날 아이들이 교과서와 인터넷과 방송 말씨에 길들어 ‘것(거)’을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 데나 툭툭 집어넣는다고 하여도, 아이들이 읽을 책에 글을 쓰는 분으로서는, 자기 말씨를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다스려 주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즐겁게 읽은 책 하나, 가슴에 살짝 안아 보았다가 책꽂이에 얌전히 꽂아 놓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인터넷방 <함께살기 http://hbooks.cyworld.com> 나들이를 하시면 책+헌책방+우리 말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2008.05.21 18:31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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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굼
박기범 지음, 오승민 그림,
낮은산,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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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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