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곽의 변천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
이상기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권에 수록된 <동국여지비고> 제1권 경도(京都) 편 성곽 조에 따르면, 서울 성곽은 태조 5년(1396)에 처음 쌓았고, 세종 4년(1422)에 고쳤으며, 숙종 30년(1704)에 훼손된 부분을 대대적으로 고쳐 쌓았다. 그러므로 성곽의 모습은 크게 3가지 유형으로 구분되어 나타난다. 태조 때에는 큰 메주만한 크기의 자연석을 다듬어 쌓았다. 세종 때에는 조금 더 큰 장방형의 돌을 기본으로 하면서 틈새에 작은 돌을 집어넣었다. 숙종 때에는 가로 세로 2자의 정방형 석재를 만들어 틈새 없이 튼튼하게 쌓았다. 시대가 흐르면서 돌의 크기가 커지고 규격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성(京城): 우리 태조 5년에 돌로 쌓았는데 평양 감사(平壤監司) 조준(趙浚)이 공사를 감독하였다. 세종 4년에 고쳤는데, 주위가 1만 4천 9백 35보로 주척(周尺)으로 재어서 8만 9천 6백 10자요, 높이가 40자 2치이다. 문 8개를 세웠다. 정남쪽 문을 숭례문(崇禮門)이라 하는데, 겹처마요 양녕대군(讓寧大君)이 현판 글씨를 썼으며 민간에서 남대문이라 부른다. 정북쪽 문을 숙정문(肅靖門)이라 하는데, 위에 집 지은 것[架屋]이 없으며 닫아둔 채 다니지 않는다. 정동쪽 문을 흥인문(興人門)이라 하는데 겹처마요 밖을 곡성(曲城)으로 둘렀으며 민간에서 동대문이라 부른다. 정서쪽 문을 돈의문(敦義門)이라 하는데, 조일회(曺一會)가 현판 글씨를 썼으며 민간에서 신문(新門)이라 부른다. (<동국여지비고> 제1권 경도(京都) 편 성곽 조)
이 중 흥인지문은 강원도와 충청좌도 그리고 경상도로 가는 사람들이 드나들던 문이다. 소위 영남대로 옛길이 이곳 흥인지문을 지나 왕십리의 살곶이 다리를 건넌 다음 한강변의 광나루로 이어진다. 물론 흥인지문 밖에서 도성 안으로 들어갈 때는, 이곳 대문을 지나 종로를 통해 광화문에 이른 다음 경복궁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