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의 후유증으로 평생동안 병마와 싸워야 했던 고 김형률씨. 그에게 있어 '환우'라는 이름은, 자신의 병이 우연적 질환이 아니라 원폭의 피해 때문임을 밝히는 역사적인 명칭이었다.
휴머니스트
자신의 아픈 몸을 역사의 한가운데 세워 인권운동의 최전선에 섰던 사람이 있다. 그 자신은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외쳤지만 '자신의 삶을 계속되게 할 것인가, 나머지 아픈 이들의 삶을 계속되게 할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결국 후자를 선택'한 사람이 있었다.
163cm, 36kg의 여린 몸으로 한국 원폭2세환우의 인권을 위해 고투하다가 짧은 생애를 마감한 고 김형률의 3주기를 맞아, 그의 삶이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됐다. 책의 제목인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부제: 원폭2세환우 김형률 평전, 전진성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는 고인이 생전에 늘 외쳤던 말이다.
지인들에게 보내는 이메일의 끝자리에도, 자신이 운영했던 '한국원폭2세환우회' 인터넷 카페의 메인 화면에도, 모든 글귀의 언저리에도 항상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그의 간절한 소망이 빠짐없이 쓰여 있었다. 그는 만으로 스물 다섯 해를 살다가 피를 토하며 죽어갔지만, 그가 남겨 놓은 것은 결코 적지 않다.
그는 자신의 병든 몸을 통해, 그 형언할 수 없는 처절한 고통을 통해 "일본제국주의가 저질렀던 침략전쟁과 식민지 수탈정책이라는 광기의 역사"를 증언했다. 그리고 역사와 정치라는 거대담론에 가려 가장 소중한 것, 즉 생명의 가치를 잊고 있던 한국 시민사회에도 한 줄기 빛을 전해 주었다.
유전자를 통해 2세, 3세의 몸으로 재생되는 원폭의 고통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미국의 원자폭탄이 투하됐을 당시, 전체 피폭자 70만 명 중 한국인 피폭자는 7만 명에 달했다. 전체 피폭자의 10%에 해당하는 비율이다. 이들 희생자는 대부분은 경남 합천이나 경기도 평택에서 건너간 사람들로, 일제 수탈에 따른 경제적 곤궁과 전시 강제부역으로 어쩔 수 없이 원폭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생존자의 대부분은 귀향했으나 고국으로부터 아무런 의료적, 경제적, 정신적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질병과 가난의 대물림 속에서 살아왔다. 일제의 피폭자들이 피폭자 원호법에 의해 치료비 생활비를 비롯한 각종 사회복지의 혜택을 누린 데 반해, 한국 원폭피해자들에게는 일본 정부도 한국 정부도 무책임과 무관심으로 일관해 왔다.
이제는 그 피해자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사람들은 원폭 피해의 문제가 이제는 과거의 역사가 됐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은 원폭피해의 문제는 결코 과거가 아니라 생생하게 현존하는 오늘의 산 역사이며 미래의 역사라고 말한다. 원폭 피해자의 고통은 한 세대에서 끝나지 않고 유전자를 통해 대물림되어 2세, 3세의 몸으로 고스란히 재생되고 있는 것이다. 그 역사의 얽힌 교차로에 바로 김형률이 있었다.
1970년에 태어난 김형률은 원자폭탄에 피폭당한 경험이 전혀 없으면서도 1945년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의해 삶이 규정돼 버렸다. 저자인 전진성 부산교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원폭 2세 환우로 태어났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이 전혀 경험한 적이 없는 과거에 의해 전 생애가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거는 전혀 기억될 수 없으면서도 너무도 생생한 흔적을 남겼다. 환우의 몸은 아직도 과거를 산다. 제대로 현재를 영위할 수가 없다."그리고 한국원폭피해자들의 불행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일제 과거가 낳은 '필연의 역사'임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김형률은 태어나면서부터 기관지가 좋지 않아 늘 감기와 폐렴을 달고 살았다. 그와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난 동생도 태어난 지 1년 6개월 만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초등학교 6년 동안은 학기 마다 한 달 이상씩 결석을 할 정도로 몸이 자주 아팠다. 중학교 1학년 때는 동생을 앗아간 폐렴으로 그도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25세가 된 1995년에도 한 해 동안 세 차례나 폐렴으로 입원했는데, 정확한 병인을 알아보기 위해 특수 피검사를 했다. 그의 병명은 '선천성 면역글로불린 결핍증'이라는 희귀병이었다. 당시 주치의는 어머니가 원폭피해자인 것과 이 병의 관련성을 암시했으나 그 이상 책임질 만한 언급은 회피했다고 한다. 김형률은 그제서야 자신이 왜 그토록 아파야 했는지, 왜 평생을 병마에 발목 잡혀 인간된 권리도 누리지 못하며 살아야 했는지를 알게 됐다.
"가엾은 핵의 아이, 모든 이들의 희망이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