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하러 갈 적에는 두근대고, 올 적에는 씩씩대고

고등학생들의 <쇠고기 수입 반대> 시 패러디

등록 2008.05.16 19:52수정 2008.05.16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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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3일 고2 독서 시간 수업은 시 패러디에 관해서 했다. 학생들이 배우는 문학 책에서 고려가요 <가시리>, 고시조 3편, 민요 <베틀노래>,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 신동집의 <오렌지> 등 다섯 작품으로 정했다.

 

그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을 골라서 자기가 쓰고 싶은 내용으로 자유롭게 써보라고 했다. 학생들은 패러디할 작품을 고르느라고 끙끙대더니 곧 쓰기 시작했다. 돌아다니면서 쓰는 것을 보니 기발한 내용들이 정말 많았다.

 

우정에 관한 것, 부모님과의 갈등, 성적에 관한 것, 야동 보고 싶은 욕망, 쇠고기 수입 반대 등 여러 가지 내용인데, 그 중 쇠고기 수입 반대에 관한 내용이 제법 많았다. 남학생 반과 여학생 반 두 개 반을 들어가서 했는데, 다음은 쇠고기 수입 반대에 관한 것 가운데 내가 고른 작품이다.

 

원작 /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 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레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으든 쇠붙이는 가라.

학생 작품(1) / 배신자는 가라

 

배신자는 가라

사랑의 껍데기만 남고

배신자는 가라

 

배신자는 가라

대선할 때에, 그 연설은 버리고

배신자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배신자는 가라.

이 곳에선 연필과 책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광화문 광장 앞에 앉아

배신감 토하며

따질 터이니

 

배신자는 가라

대통령에서 구의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으든 배신자는 가라.

 

학생 작품(2) / 이명박은 가라

 

이명박은 가라

오월의 촛불 시위만 남고

이명박은 가라

 

미친 소는 가라

조류들의 AI 아우성만 살고

미친 소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이명박은 가라

이 곳에선, 키보드 위에 두 손을 올린

4천만 네티즌이

컴퓨터 앞에 서서

키보드 워리어를 일으키며

탄핵 서명을 할지어니

 

이명박은 가라

다시 처음부터

노간지와 문뽀삐만 남고

그 매국노 버금가는 놈은 가라

 

신동엽 시인의 시 <껍데기는 가라>를 학생들은 위의 작품으로 패러디했다. 대통령을 '배신자', '매국노'로 비난했다. 학생들이 많이 촛불시위에 참가했는데, 그것을 '연필과 책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로 나타냈다.

 

작품(2)는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몇 군데 있어 나중에 직접 학생에게 물어보았다. '조류들의 AI 아우성만 살고'가 내용의 흐름상 어울리지 않다고 했더니, 그것은 고온에서 끓이면 먹을 수 있지만 광우병 걸린 소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보다는 낫다는 뜻이라고 했다.

 

'키보드 워리어'도 몰라서 학생의 설명을 들어야 했다. '워리어'는 '전쟁을 하는 사람'인데, 여기에서는 '자판을 전쟁하듯이 막 치는 사람'이란 뜻이라고 했다. 부끄러웠지만 상냥하게 설명해주는 학생이 참 고마웠다.

 

'노간지'는 퇴임 후 고향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전직 대통령 '노무현'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았는데, '문뽀삐'는 무엇인지 몰라 물어봤다. 학생은 '문국현'을 가리키는데, 그의 별명이라고 알려주었다. 시 패러디를 통해 오히려 내가 학생에게 많은 것을 배운 셈이 됐다.

 

원작 / 베틀 노래 - 작자 미상

기심 매러 갈 적에는 갈뽕을 따 가지고

기심 매고 올 적에는 올뽕을 따 가지고

삼간방에 누어 놓고 청실 홍실 뽑아 내서

강를 가서 날아다가 서울 가서 매어다가

하늘에다 베틀 놓고 구름 속에 이매 걸어

함경나무 바디집에 오리나무 북게다가

짜궁짜궁 짜아 내어 가지잎과 뭅거워라

배꽃같이 바래워서 참외같이 올 짓고

외씨 같은 보선 지어 오빠님께 드리고

겹옷 짓고 솜옷 지어 우리 부모 드리겠네

학생 작품(3)

 

시위하러 갈 적에는 두근 대고

시위하고 올 적에는 씩씩 대고

청계천에 텐트 치고 울긋불긋 촛불 들고

이리 가서 흔들다가 저리 가서 흔들다가

하늘 높이 고개 들고 청계천에 함성 실어

플래카드 우리 눈물 가득 실어 울부짖다

미친 소 몰아내어 우리 아우 지켜주고

2MB 몰아내어 우리 부모 주름 피네

 

4음보로 된 우리의 민요인데, 한 학생이 이것을 패러디한 작품이 (3)이다. 제목은 붙이지 않았지만 원작의 흐름과 거의 비슷하게 잘 패러디했다. 학생 신분에 촛불 시위하러 가니 두근댔는데, 하고 올 적에는 울분에 차서 씩씩댄다는 표현이 눈에 띄었다.

 

'플래카드 우리 눈물 가득 실어 울부짖다'하는 표현은 거기에 참가했던 수많은 시민의 마음을 단적으로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했다. 쇠고기 수입을 막아내어 아우를 지키고, 부모 근심을 덜어준다는 학생의 마음이 절절히 내 가슴에 와 닿았다.

 

원작 / 오렌지 - 신동집 지음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아닌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가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에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누구인지 잘은 아직 몰라도

학생 작품(4) / 미국소

 

소고기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소고기는 여기 있는 미국산 소고기다

더도 덜도 아닌 소고기다

내가 보는 소고기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소고기를 맛있게 구워먹을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소고기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소고기를 맛있게 데쳐먹을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소고기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소고기를 아무도 먹을 수 없다

대는 순간

나는 이미 내가 아니고 만다

내가 먹는 소고기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모든 시민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다

아픔이 똘똘

치매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먹는 순간

소고기의 포들한 육질에

한없이 검은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무슨 병인지는 잘 몰라도

 

이 작품은 패러디할 작품 중 하나로 골랐지만 원시가 워낙 어려워 학생들이 쓰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몇 학생이 패러디했다. 작품(4)는 미국산 쇠고기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아무도 그 쇠고기를 먹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마지막 두 연은 쇠고기 수입에 직면해 있는 우리 국민 모두가 위험한 상태라고 하면서, 아픔이 똘똘 치매의 또아리를 틀고 있고, 검은 그림자가 그 쇠고기에 비치고 있다고 했다. 학생은 치명적인 광우병을 '무슨 병인지는 잘 몰라도'라고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관한 시 패러디를 통해 학생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그들의 걱정하는 목소리가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의 귀에까지 들려 누구나 다 수긍할 수 있는 해결책이 나오길 학생들 작품을 보며 간절히 바랐다.

2008.05.16 19:52ⓒ 2008 OhmyNews
#유정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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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즈음 큰 기쁨 한 가지가 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마이뉴스'를 보는 것입니다. 때때로 독자 의견란에 글을 올리다보니 저도 기자가 되어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우리들의 다양한 삶을 솔직하게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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