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 스님이 깨침을 얻은 자리에 세운 실상선원.
안병기
경허 스님이 깨달음을 얻은 자리에 세운 실상선원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동학사 경내에서 가장 큰 나무인 염주나무 좌측엔 북쪽으로 가는 작은 길이 나 있다. 이 길이 실상선원으로 가는 길이다. '이곳은 등산로가 아니라 스님들이 공부하는 곳이니 출입을 금해 주시면 고맙겠다'라는 표지판이 한쪽으로 밀쳐져 있고 몇몇 사람들이 앞서 가고 있다.
조금 올라가자, 쭉쭉 뻗은 편백나무 숲이 나그네를 맞는다. 측백나무과에 속하는 상록교목이다. 측백나무 숲 가운데로 난 길을 조금 들어가자 이내 실상선원이 장중한 자태를 드러낸다. 아, 이곳이 정녕 경허 스님이 견성했던 곳이란 말인가.
이곳은 경허 스님께서 견성오도하신 자리이기도 하지만, 1814년 (이조순조 14년)에 금봉 화상께서 실상암을 지었던 자리이기도 하다. 경허 스님이 토굴을 짓고 참선 삼매에 드셨던 당시에도 실상암이라 불렀기 때문에 선원의 이름도 그를 좇아 지은 것이다. 일체 존재의 참모습을 참구하는 장소라는 뜻에서 실상이다. 1989년 당시 주지였던 일초 스님이 복원을 시작하여 성원 스님이 완공한 건물이다.
근대 선불교의 중흥조라고 일컫는 경허 스님(1849 ∼ 1912). 전주에서 태어난 스님은 9세때 경기도 과천 청계산에 있는 청계사로 출가하였다. 속가의 이름은 송동욱, 법호는 경허(鏡虛), 법명은 성우(惺牛)이다.
이곳 동학사와 서산 연암산 천장암에서 깨침을 얻은 뒤 여러 사찰을 돌아다니면서 선원을 개설하고 수좌들을 지도했다. 이후 다시 천장암으로 돌아와 수월·혜월·만공 스님 등 뛰어난 선지식을 길러내신 뒤 오대산 월정사와 금강산을 거쳐 함경남도 안변의 석왕사에서 잠시 머물고서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한동안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돌연 환속하여 박난주라고 개명하였고,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함경도 갑산(甲山) 웅이방 도하동에서 1912년 4월 25일 새벽에 임종게를 남긴 뒤 입적하였다. 온갖 기행으로 얼룩진 경허 스님에 대한 글은 많이 있다. 그중에서도 소설가 최인호가 쓴 네 권짜리 <길 없는 길>(1993. 샘터사)이 대표적이다.
1918년, 3권 2책으로 된 한국의 불교사인 <조선불교통사>를 기술한 역사학자이자 불교학자인 이능화(李能和)는 근대편에서 경허 스님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경허화상이 변재(辯才)를 갖추었고, 그가 하는 설법이 비록 조사(祖師)들을 따르고는 있지만 지나치지는 않다"고 하지만, 호탕하여 삼가고 경계하는 것이 없으므로 사음·살생계를 범하는 데에까지 이르고서도 (그것을) 마음속에 두지 않는다. (요즈음) 선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이를 따르고 있다. 심지어는 미치광이처럼 말을 하고 술을 마시며 고기를 먹기까지 하면서도 보리에 막힘이 없다. 도적질을 하고 음난한 행동을 하면서도 반야에 거리낌이 없다. (그러면서) 이것을 일컬어 '대승선(大乘禪)'이라고들 하면서, 그 무행(無行)이 지나친 것을 가리고 꾸미기 위해 당당하게 이 모두가 옳다고 한다. 대개 이러한 잘못된 풍습은 실은 경허가 처음으로 잘못된 풍조를 만들면서부터였다. 총림에서는 그런 까닭에 (그것을) 마설(魔說)이라고 한다. 내가 감히 경허 선사의 오처(悟處)와 견처(見處)를 알지는 못하지만, 만약 불경과 선자(禪書)들을 가지고 그 일을 논한다면 옳지않은 것 같다.위의 글은 길 글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간혹 고기를 먹었다고 전하는 전제(顚濟) 화상과 현자 화상의 예까지 들어가며 호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이능화의 비판이 그릇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쓰러져 가던 근대선맥을 다시 일으킨 경허 스님의 공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1879년 11월15일, 동학사 강주로 있던 경허 스님은 절 아래 학봉리에 살던 이처사라는 분이 던진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라는 한마디를 전해 듣고는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길고 긴 오도송을 읊었다. 아래 네 구절은 마지막 부분이다.
홀연히 들으니 사람이 말을 하되 콧구멍이 없다 하네(忽聞人語無鼻孔)문득 깨치고 보니 삼천대천 세계가 다 내 집일세.(頓覺三千是吾家)한여름 연암산 아래 길에서 (六月燕巖山下路)들사람이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네.(野人無事太平歌)실선선원 앞마당에선 천황봉과 그 옆에 있는 석문이 빤히 바라다 보인다. 어쩌면 오도송을 읊고 난 경허 스님은 환희심에 잠겨 마치 사자처럼 펄쩍펄쩍 뛰지 않았을까. 그런고 나서 마음이 진정되자, 저 천황봉과 석문을 우러러보지 않았을까. 아니면 가사를 벗어던진 채 덩싱덩실 춤이라도 추었는지 모른다. 모르긴 해도 경허 스님뿐 아니라 모든 선승들이 목숨을 걸고 수행에 매달리는 건 그런 한순간의 환희를 위해일 것이다.
마치 경허 스님을 친견한 듯한 기분을 안고 길을 내려온다. 길을 거의 다 내려와 강설전 뒤편 산기슭에 있는 고추밭으로 올라간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공양을 타려고 늘어선 줄이 장난이 아니다.
불기 2552년 석탄일. 나이들수록 영혼이 더욱 배고파지는 나여. 저런 밥 줄이 아니라 영혼의 밥 한 그릇을 타려는 길고 긴 줄에 내 육신을 서 있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