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수채화의 집예전에는 병원이었던 곳. 할아버지가 의사 일을 그만둔 뒤로는 수채화 집으로 고쳐서 쓰는 곳. 할머님 보금자리이며 일터이고, 동네 사람들 그림 배우는 집입니다.
최종규
저는 제가 찍은 사진을 빨래집게로 집어서 빨랫줄에 착착 걸어놓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누런테이프로 해서 벽이나 문에 붙여놓곤 했습니다. 떠올려보니, 예전 우리 집에 놀러오시는 분들이 ‘작품에다가 테이프를 그렇게 붙여놓으면 어떡해요?’ 하고 물었구나 싶습니다. 그림이든 사진이든, 작품으로 여기면 작품이지만, 작품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나 스스로 즐기고 싶고, 내 이웃하고 더욱 가까이 즐기고 싶어서 이렇게 붙여놓습니다. 언제라도 스스럼없이 즐기고, 언제라도 떼어낼 수 있습니다. 다음 그림이나 사진이 나오면 다음 그림이나 사진을 붙입니다. 그리고 이 그림이나 사진은 누구한테라도 기꺼이 내어줄 수 있습니다. 어디 돈을 바라는 사회단체가 있다면 잘 여미어서 그림틀이나 사진틀에 담아서 알맞는 값을 받고 팔아서, 그림이나 사진 판 값을 모두 바치기도 합니다.
.. 암기할 수밖에 없다, 라고 선생님과 동급생들이 입을 모아 말하지만, 나는 그런 방법을 써 오지 않았었다. 암기는 하지 말라, 아무리 하더라도 사전에는 이기지 못한다. 만물박사는 되지 말라, 너희들이 만물박사가 된다 하더라도 백과사전에는 이기지 못한다. 너희는 왜 야간중학에 왔는가? 왜라는 의문에 매달릴 때 그것이 너희들에게는 진짜 공부이다 .. (81쪽)박정희 할머님이 그리는 수채그림을 ‘미술사’라는 테두리로 보면 어떤 대접을 받을까 하는 데로 생각이 이어집니다. 글쎄요, 우리 나라 미술 역사에서 수채그림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는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어떤 사람들 어떤 그림이 들어가 있을는지.
역사에 담는 그림은 무엇이며 역사로 다루는 그림은 무엇일는지. 미술평론가라는 이름을 걸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그림을 보면서 글을 쓰고 논문을 쓰고 책을 쓰는지. 신문이나 방송에서 알리는 그림잔치 소식은, 어떤 그림을 그린 사람들 소식을 알리는지.
.. 선생님께서 “갖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학생들은 텔레비전, 돈, 연인, 꽃이라는 등의 대답이었지만, 나는 “꿈을 주세요”라고 큰소리로 대답하자, 선생님과 학생들은 모두 놀라 숨을 들이켰다 .. (91쪽)할머님은 옆지기보고 “그러면, 지금 한 장 그리고 가지?” 하고 묻습니다. 옆에서 그림을 그리는 다른 아주머니들도, “그래요, 지금 그리고 가요?” 하고 묻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직 아침밥도 안 먹은 몸. 그리고 제 몸은 몹시 안 좋습니다. 지난주부터 앓는 몸살이 아직 다 안 떨어졌습니다. 입술과 코가 부르트고 입안이 다 헐고 부어서 말하기도 힘들고 숨쉬기도 벅찹니다.
다음주부터 와서 그림을 그리겠다고 몇 번 거듭 말씀을 드리며 자리를 물러나옵니다. 옆지기는 나보고도 함께 그림을 그리자고 하는데, 어찌해야 할까 모르겠습니다. 그림을 그리고픈 마음도 있으나, 그러자면 십만원인데. 요즘 우리 형편에 오만원까지는 더 치를 수 있다지만 십만원이라면.
그러나 여든여섯 그림할머님한테 그림을 배울 수 있는 나날도 앞으로 얼마 없다는 데에 생각이 미칩니다. 때는 기다리지 않는 법이라고, 언제 찾아오는지 알 수 없는 법이라고, 왔는지 모르고 지나치다가는 그예 돌이킬 수 없게 되는 법이라고, 나중에 돈이 조금 넉넉해져서 그림을 그릴 틈이 주어진다고 할 때에는 그림할머니가 이 세상 분이 아닐 수 있어요. 그때 가서 아이고, 저번에 그림 배우자고 할 때 배울걸, 하고 땅을 친들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 1일 1과, 소화해 가는 수업은 선생님도 허탈하겠지만 우리 쪽은 더욱 허탈하고 비참하다. 배운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의 원점을 확신하기 위해서 바다를 건너왔는데, 이 현실은 무엇이란 말인가? .. (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