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의 종래 이미지는 술과 여자와 풍류를 좋아하는 ‘탕자’였다. 드라마 <대왕세종>>
KBS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 양녕대군의 종래 이미지는 이른 바 '탕자'였다. 왕세자의 본분도 잊은 채 술과 여자와 풍류를 좋아하다가 결국 자리에서 밀려난 비운의 왕자라는 이미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종래 이미지가 드라마 <대왕세종>에서 상당히 흔들리고 있다. <대왕세종> 속의 세자 이제(훗날의 양녕대군)는 단순히 '탕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미지를 띠고 있다.
가상의 설정이기는 하지만, <대왕세종> 속의 양녕은 얼마 전부터 요동수복(요동정벌·만주정벌)의 기수로 떠올랐다. 양녕에게 꽤 멋진 이미지를 씌워주려나 보다 했지만, 그것은 결코 양녕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게 아니었다.
양녕의 요동수복은 '무모한 자주론'?명나라 황제칙사 황엄의 밥상을 뒤엎은 양녕. 요즘 식으로 말하면 토지공개념(엄밀히 말하면 토지국유제) 원칙을 깨면서까지 요동수복 비자금을 조성하려는 양녕. 마음씨 좋은 온건파 최윤덕(경성절제사)보다는 속좁은 강경파 이천(군기감정)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대(對) 여진족 관계를 한층 더 복잡하고 어수선하게 만든 양녕.
위와 같은 대(對)명나라 관계, 대(對)여진족 관계에서 나타나는 양녕의 일관된 특징은 ‘무모함'이다. 그의 요동수복론은 좋게 말하면 '젊은 혈기의 결과물'이겠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그보다는 '무모함의 결과물'이라는 측면이 보다 더 강조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드라마 속의 요동수복론은 결코 좋은 이미지를 띠고 있지는 않다. 대외관계에서 '무모한 자주'보다는 '합리적 타협'을 은근히 더 높게 평가하는 <대왕세종>의 분위기는 어쩌면 최근 한국의 정치적 변화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을지 모른다.
대외관계에서 나타나는 '무모함'에 더해 대내관계에서 나타나는 양녕의 특징은 '폭군'이다. <대왕세종> 제30회(4월 20일)에서 외숙부들인 민무휼·민무회에 대해 귀양과 동시에 사사(賜死) 처분을 내린 이후로 '국왕 직무대행' 양녕은 본격적으로 폭군의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다.
조카에게 배신을 당하고 귀양을 떠나는 민무휼이 뼈있는 한 마디를 던졌다. "너도 네 아비와 다를 바 없다!" 너도 피 위에서 시작하는 것이라는 그 말은 드라마 속 양녕의 가슴에 비수를 찌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드라마 속의 양녕은 아버지 이방원이 그러했듯이,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외숙부건 측근이건 간에 누구든지 죽일 수 있는 '이방원 II'의 이미지를 띠고 있다.
외숙부 말대로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폭군이 되련다'라고 결심이나 한 듯이, 양녕은 "나에게 불복하는 신하가 어떻게 될지 이번에 똑똑히 보았을 것"이라며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를 것처럼 덤벼들고 있다. 이를 보다 못한 젊은 김종서가 양녕에게 한마디 했다. "폭군이 되고자 하십니까?"
이와 같이 <대왕세종>에서는 종래의 '탕자 양녕'에 더해 '무모한 양녕' 및 '폭군 양녕'의 이미지까지 덧칠되고 있다. '무모함'이나 '폭군'의 이미지는 사료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는 상상에 기초한 것이므로, 그 진위 여부를 따지기보다는 양녕이 왜 그렇게 묘사될 수밖에 없는지를 살펴보는 게 더 바람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