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숙인 이건희 회장과 이학수 실장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이학수 전략기획실장이 22일 오전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경영쇄신안 발표 기자회견에서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있다.
권우성
이건희 회장. 그는 미우나 고우나 우리 세대의 '일그러진 영웅'이었다. '날강도 귀족' 재벌체제의 대표주자였으며 부패한 구체제의 간판얼굴이었다. 아니, 그는 우리 사회의 '마지막 황제'였다. 검찰 등 국가기관과 사회엘리트들을 검은 돈의 환대로 주무르며 치외법권의 특권을 누려왔던 은둔의 황제가 특검의 두 차례 소환조사와 초대형 배임조세포탈 기소 앞에서 두 손 들고 대국민 사죄와 함께 무대 뒤로 불명예 퇴장한 셈이다.
이 회장 개인으로서는 이렇게 물러나는 회한이 어찌 없으랴. 더 펼쳐보고 싶은 꿈이 왜 없으랴. 그에게 밥줄을 의탁했던 삼성 식구들도, 더 잘 사는 꿈의 통로를 발견했던 일반 국민들도, 그의 어두움을 비난해 왔던 비판적 지식인들도 모두 다소 복잡하고 착잡한 심정이리라. 그렇기에 물러나는 그에게 돌을 던질 이유는 느끼지 못한다.
다만 이 회장과 가신그룹의 동반퇴진 신공(神功)에도 불구하고, 이 회장이 삼성판 종합비리 사단을 제공한 3세 불법승계 의지를 버리지 못한 탓에 이 회장 일가의 화근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은 분명히 해두지 않을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이번 경영쇄신안에는 이재용 남매가 그룹 차원의 배임범죄의 산물로 특혜 인수해서 보유 중인 에버랜드 지배지분과 SDS 지배지분 등 장물성 재산의 처리 방안이 의도적으로 빠져 있다. 이는 이번 삼성쇄신안의 '디테일' 속에 숨겨진 악령이자 여전히 남은 이 회장의 아킬레스건으로서 이 회장 일가와 우리 사회에 앞으로도 두고두고 꺼지지 않을 갈등의 불씨가 될 게 틀림없다.
이건희 퇴진으로 '구체제' 마감해야아무튼 이번 삼성쇄신안의 참뜻은 에버랜드 지배지분을 밑천 삼아 머지않아 이재용 전무를 삼성그룹의 새 총수로 세우겠다는 뜻인 바, 이건 안 된다. 알량한 공소시효, 조세시효, 소송시효 등 범죄자의 변명 속으로 숨지는 말자.
이재용 전무와 그의 자매들이 오직 부친 이 회장의 권력형 배임범죄 덕에 취득한 계열사 지분재산의 힘으로 전원 우리나라 자본가서열 상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건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바로 그 조직적 배임범죄 탓에 이 회장과 가신그룹이 일제히 단죄받은 이 마당에 이재용 남매가 장물성 재산을 그대로 보유하는 것은 어떤 정의관념에도 반한다. 국민들과 삼성임직원들이 용납하지 못하고 국제사회가 납득하지 못한다. 글로벌 해법은 단 하나. 깨끗이 포기하고 꿈을 접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곡을 애써 피해간 삼성쇄신안이 '이재용의 삼성을 위한 숨고르기'라는 비판에 직면한 것은 당연하다.
이 회장의 문책성 퇴진과 삼성의 전략기획실 해체 등 삼성쇄신안은 삼성그룹을 넘어 이 땅에서 황제경영과 배임세습, 그리고 뇌물부패로 얼룩졌던 구체제를 확실하게 마감하는 일대 전기로 승화돼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 사회가 갈 길은 여전히 멀고 험하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최대한 직무 및 직업윤리를 위배하며 이 회장 등 재벌일가 봐주기를 거듭해온 관련 국가기관, 친재벌언론, 보수논객, 변호사와 회계사 등 전문가집단이 이제 거듭나야 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대한 성의있게, 작금의 '날강도귀족 시대'를 끝장내고 그야말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새 시대, 나아가서 경제민주화의 새 시대를 활짝 열어젖힐 구체적이고 실효성 있는 방안들을 내놓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