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교에서 바라본 연산천.
안병기
계백 장군 최후의 결전장이었던 황산벌황산성 답사를 위한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연산시장이 있는 연산리에서 철길을 지나 관동교를 건넌다. 이곳이 백제의 계백 장군이 결사대 5천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신라 장군 김유신의 5만 군사와 최후 결전을 벌였던 황산벌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조는 계백의 최후에 대해 간략하게 서술하고 만다.
又聞唐羅兵已過白江·炭峴 遣將軍 伯 帥死士五千 出黃山 與羅兵戰 四合皆勝之 兵寡力屈竟敗 伯死之 於是合兵禦熊津口 瀕江屯兵 定方出左涯 乘山또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 (왕은) 장군 계백(伯)을 보내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에 나아가 신라 군사와 싸우게 하였다. (계백은) 네 번 크게 어울려 싸워[會戰]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도 꺾이어 드디어 패하고 계백도 죽었다. 역사는 승자의 전리품이다. 패자에게 너그럽기를 기대하는 건 망상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무열왕조는 당시의 상황을 세세히 묘사하고 있다.
秋七月九日 庾信等進軍於黃山之原 百濟將軍 )伯 擁兵而至 先據 設三營以待 庾信等 分軍爲三道 四戰不利 士卒力竭 (중략)左將軍品日 喚子官狀 一云官昌 立於馬前 指諸將曰 “吾兒年十六 志氣頗勇 今日之役 能爲三軍標的乎” ○○官狀 曰 唯 以甲馬單槍 徑赴敵陣 爲賊所擒 生致 伯 伯脫胄 愛其少且勇 不忍加害 乃嘆曰 新羅不可敵也 少年尙如此 況壯士乎 乃許生還 (660년) 가을 7월 9일에 유신 등이 황산(黃山) 벌판으로 진군하니, 백제 장군 계백(伯)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세 군데에 진영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 등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네 번을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고 사졸들은 힘이 다빠지게 되었다. 이렇게 형편없던 신라군의 사기를 끌어올린 것은 화랑 관창의 죽음이었다. 16세 소년 관창을 사로잡은 계백은 처음엔 살려주었으나 재차 돌격해오자 할 수 없이 죽이고 만다. 관창의 죽음으로 사기가 크게 오른 신라군은 백제군을 무찌른다. 마침내 계백은 죽고 좌평 충상과 상영(常永) 등 20여 명은 사로잡히는 것으로 싸움은 끝이 난다.
벌판 한가운데로는 연산천이라는 꽤 너른 하천이 흘러가고 있다. 아마도 예전엔 하천 폭이 훨씬 크고 유량(流量)도 많았을 것이다. 계백이 황산벌을 마지막 싸움터로 택한 것이 이것 때문이었던가. 그는 소위 말하는 배수의 진을 쳤던 것이다. 연산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고 있었을 백제군과 신라군의 광경을 상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