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명수 고문은 강의 내내 '언론의 자유'와 '신뢰'를 강조했다.
김종석
장명수가 걸어온 '기자의 길'을 고통스럽게 한 것은 억압된 언론 자유 뿐만이 아니었다.
1963년 한국일보 16기 수습기자로 출발한 뒤, 종합일간지 사상 첫 여성 주필과 사장이라는 화려한 기록을 만들어간 그이지만,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 뒤에는 가시덤불을 맨 손으로 헤쳐 가는 아픔이 있었다.
'창경원'이 여기자들의 유일한 출입처였던 시절, 그는 회사에서 '미스 장'으로 불렸다. 출근하면 "미스 장, 커피!"라는 부장의 주문에 큰 주전자로 물을 끓여 부서 전체에 커피를 돌리기도 했다. "미스 장은 신문사를 얼마나 더 다닐 건가?"란 편집국장의 물음에 '큰맘 먹고' "5년이오"라고 했다가 "5년이나 다닌다니 기특하다"는 얘길 들은 일도 있다. 여기자가 결혼하면 그만 두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시절 이었다.
그런 '미개한' 시대에 기자 장명수를 버티게 한 것은 오로지 글에 대한 열정이었다. 전쟁 직후 모든 것이 궁핍했던 중학교시절, 우연히 '거울'이라는 학교신문을 보고 매료돼 기자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의 첫 졸업생으로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신문사의 문을 두드렸던 터였다.
선배들의 문장을 베껴 써 보면서, 국어사전을 품고 다니면서 글을 갈고 닦았던 그에게 어느 날 드문 기회가 주어졌다. '여기자칼럼'이라는 이름으로 매일 고정칼럼을 쓰라는 것이었다. 하루하루, 그는 죽을 힘을 다했다.
그러나 그가 칼럼의 소재를 '여성스러운' 생활문화에서 정치 쪽으로 확대하자, 사내에서 엄청난 견제가 쏟아졌다. '정치부도 거치지 않고 무슨 정치 칼럼이냐' '한국일보가 웃음거리가 된다'는 비난이 빗발쳤다. 그는 굴하지 않았다. '나는 정치를 모르기 때문에 평범한 독자의 입장에서 정치를 바라보는 칼럼을 쓸 것'이라고 고집했다.
정계에 아는 사람이 없어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았고, 여자이기에 학연과 지연으로부터도 자유로웠던 장명수의 정치칼럼은 곧 독자들의 눈길을 모았다. "우리가 정말로 궁금하고 답답하게 생각하는 것을 속 시원하게 써 준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장칼'은 그렇게 탄생했다. '장명수 칼럼'의 줄임말이자 칼날처럼 날카롭다는 의미를 담은 칼럼니스트 장명수의 별명이 '장칼'이다.
그렇게 글을 통해 명성과 신뢰를 쌓아갔지만, '여기자' 장명수는 여전히 회사의 차별에 눈물을 삼키는 처지였다. 그는 늘 남자 동기들 보다 1년쯤 늦게 승진이 되었다. 동기를 부장으로 '모시고' 차장으로 일하느라 인고의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어찌어찌 부국장까지 올라간 뒤에는 남자 후배 7명이 자신을 넘어 편집국장이 되는 9년 동안 '사무실의 붙박이 책상처럼' 자리를 지켜야 했다. 선후배 서열이 엄격한 신문사에서 그 9년은 단 하루도 개운한 마음으로 출근한 적이 없는 자기모멸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타협하지 않는 글'을 자존심처럼 지키며 그 세월을 견뎠다. 그리고 살아남아 꽃을 피웠다.
"어느 날 사장이 나를 불러 주필을 시키겠다고 하더군요. 편집국장도 해 보지 못한 처지라 너무 놀라서 '정말이세요?'라고 두 번을 거듭 물었습니다. 그리곤 사장실을 나와서 왜 그렇게 바보처럼 되물었을까 후회했습니다. 차별에 대해 늘 분개했지만, 나 스스로도 여성은 주필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차별적 사고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반성 했습니다"그는 "부장까지를 한계로 생각하는 사람과 최고경영자까지 생각하는 사람의 자세는 다를 수밖에 없다"며 예비 여기자들에게 '무한도전의 정신'을 당부했다. 실력으로 버티고, 타협하지 않으면 어떤 편견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국어사전을 챙겨라"언론인이 되고 싶어 세명 저널리즘스쿨에 왔다는 예비 후배들에게 장 고문은 애정 어린 충고를 쏟아 놓았다. "단순히 뉴스를 전달하는 리포터(reporter)가 아니라, 진실과 시대정신을 글에 담는 저널리스트(journalist)가 돼야 합니다."
물 위에 삐죽 나온 빙산의 한 부분만을 보고 '사실(facts)'이라고 흥분할 것이 아니라, 수면아래 감춰진 거대한 진실이 무엇인지를 파헤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감춰진 진실'을 파고들기 위해서는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는 호기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쉽고 정확하게 정보를 전달하려면 욕심 많은 글쟁이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설가 신경숙이 오정희의 글을 필사했던 것처럼 빼어난 선배의 글을 옮겨 써보며 배우려는 열정이 있어야 하고, 우리말에 대한 지식을 넓혀가는 노력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수습기자들에게 매번 말한다고 한다. "책상 위에는 언제나 국어사전을 챙겨둬라."
무려 9명의 대통령을 거치며 지난해까지 47년간 백악관을 출입한 88세의 미국 여기자 헬렌 토머스. 그의 별명은 한번 물면 놓지 않는다는 '불독'이다. 여성으로서 첫 백악관 출입기자 협회장을 지낸 '불독'과 '장칼'은 기자직을 '평생의 업'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장 고문은 "정계로 나가는 징검다리 등으로 언론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으면 언론이 독자의 믿음을 얻을 수 없다"고 말했다. 어제까지 신문에 정치기사와 논설을 쓰던 사람들이 정치권에 자리를 얻어 줄줄이 나가는 것을 보면 독자들이 신문의 공정성을 믿겠느냐는 것이다.
"기자는 고된 노동이 따르지만 큰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은 아닙니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지만 판단은 늘 혼자 해야 하는 고독한 직업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기자를 할 것인지,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 보세요. 힘들어도 평생 이 일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기자의 길을 선택해야 우리 언론에 희망이 있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공유하기
'장칼' 장명수 "재벌 입김으로 언론 제2의 위기"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